3부. 판이 커진다
12화. 전면전과 공동전선
배출구에 여섯 번째 장이 반쯤 걸려 나왔다.
지안은 그 종이를 손으로 빼내면서 사유 칸만 봤다.
내부 심의 기준 미충족.
앞의 다섯 장도 같은 여섯 글자였다.
태건백화점 본점, 잠실, 판교, 대구. 태건몰. 태건라이브.
지안은 여섯 장을 책상에 부채처럼 벌려 놓았다.
“12월 기획전 취소분 4억 2천.”
볼펜으로 두 번째 장을 짚었다.
“팝업 보증금 8천. 광고 선집행 6천.”
세 번째 장까지 짚고 볼펜을 세웠다.
“합이 5억 6천.”
민아가 노트북을 돌려 보였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대표님, 태건몰만이 아니에요. 제휴 연계 서비스 세 곳도 새벽에 노출에서 빠졌어요.”
“어떻게 빠졌어.”
“’아뜰리에 안’ 검색하면요.”
민아가 화면을 확대했다.
첫 줄에 엘리스모드의 긴 외투가 떠 있었다.
지안은 화면을 삼 초쯤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장해. 시간, 검색어, 순위. 화면 저장 파일명에 날짜 넣고.”
“소송 하실 거예요?”
“소송은 나중이고, 이건 오늘 쓸 물증이야.”
“세 곳이 하루에 같이 빠지는 게 가능해요?”
“가능하니까 빠졌지. 누가 전화 한 통 돌렸다는 뜻이야.”
열 시 정각에 전화가 왔다.
지안은 발신자를 확인하고 녹음 아이콘을 먼저 눌렀다.
“조현우입니다. 대표님,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리려고요.”
“통보서 여섯 장 보냈으면 사과할 일은 아니죠. 업무잖아요.”
“저희 심의가 좀 깐깐해서요. 요즘 업계에 말이 좀 돕니다. 정보 출처가 이상한 브랜드라고.”
지안은 볼펜을 놓았다.
“출처가 이상하다는 게 무슨 뜻이죠.”
“사진 한 장이 참 무섭더라고요.”
‘왔다.’
지안의 목소리는 낮아지지도 높아지지도 않았다.
“상품 기획자님, 통보서에 심의 기준 미충족이라고 쓰셨죠. 그 기준을 문서로 주세요.”
“기준은 내부 자료라서.”
“항목이든 점수표든 상관없어요. 못 주면 그건 심의가 아니라 지시예요. 그리고 지시는 공정위가 좋아하는 단어예요.”
수화기 너머가 반 박자 비었다.
“대표님, 말씀이 세시네요.”
“저는 지금 4억 2천을 잃었고 상품 기획자님은 사과를 하고 계신데, 이 통화에서 숫자를 말한 사람이 저 하나예요.”
“저희도 입장이 있습니다.”
“입장은 문서로 쓰세요. 지난달 우리 매출 순위, 반품률, 고객 불만 건수 다 드릴 수 있어요. 그 셋 중에 미충족인 항목이 뭐죠?”
“그건 종합적으로.”
“종합이면 항목 세 개는 통과라는 얘기고요.”
또 반 박자 비었다.
“오늘 오후 여섯 시까지 서면으로 부탁드립니다. 아, 이 통화는 녹음됩니다. 아까 첫 마디 전에 눌렀어요.”
끊긴 화면 위로 녹음 파일 길이가 4분 12초로 떴다.
지안은 검은 노트를 펼쳐 12월 셋째 주 칸에 다섯 글자를 적었다.
유통 봉쇄. 전면전.
그리고 손끝으로 앞장들을 훑었다.
유라가 찍어 넘긴 페이지가 어디까지인지 세는 손이었다.
11월 3주 카멜. 12월 1주 숏패딩. 2월 물류대란.
세 장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하필 그 세 장이야.’
오후 두 시에 유라의 화장품 정식 계약이 보류됐다.
이유는 광고주 사정, 한 줄이었다.
유라는 화장을 반만 지운 얼굴로 사무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저 이거 사인만 남았던 거예요. 열 배로 올린다고 대표님이 그러셨잖아요.”
“단가는 그대로예요. 광고주가 태건 계열 유통에 물건을 넣는 회사라 오늘 겁을 먹은 거고.”
“그럼 저 어떡해요.”
“내일 다른 데서 두 건 들어와요.”
유라가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아세요.”
“내가 만들 거니까.”
유라의 입술이 떨렸다. 그리고 터졌다.
“저 때문이잖아요. 저는 그냥, 사진 한 장 보낸 것뿐인데. 왜 다들 저만 피해자로 안 봐줘요?”
지안은 손수건을 꺼내지 않았다.
책상에서 계약서 사본을 집어 유라 무릎 위에 올렸다.
“제17조. 읽어요.”
“대표님.”
“이면 접촉 시 위약금 10배. 3억이에요. 지금 우리 사이에 남은 건 그 조항이고, 그게 당신이 오늘 안 잘린 유일한 이유예요.”
유라의 얼굴이 하얗게 식었다.
“고소하실 거예요?”
“오늘 여섯 시 촬영, 그대로 갑니다.”
“이 얼굴로요?”
“화장 다시 올리고 차에 타요.”
“기획전도 없어졌는데 촬영은 왜 해요.”
“기획전이 없어졌으니까 해요. 다음 판매처에 보여줄 컷이 있어야 협상이 되지.”
지안은 문 앞에서 한 번 돌아섰다.
“당신 얼굴값은 태건이 아니라 내가 정해요. 그쪽은 당신을 3억으로도 안 사요. 나는 이미 샀고.”
차 안에서 문자 하나가 들어왔다.
번호가 저장돼 있었다. 권재혁.
이번 12월엔 눈이 많이 온다더군요. 반지하는 물이 찬다던데.
지안은 답장하지 않고 화면 저장만 떴다.
저녁 여섯 시 반, 파주 3터미널 A라인.
컨테이너 앞에 시헌이 서 있었다.
발밑에 짐 받침대 하나가 비어 있었고, 그 위에 종이 봉투가 놓여 있었다.
“촬영은요.”
“여덟 시 콜로 밀었어요. 지금은 물류가 더 급해서.”
“급한 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헌이 봉투에서 서류철 두 개를 꺼내 짐 받침대 위에 올렸다.
“세온물류 지분 구조표. 그리고 이사회 명단입니다.”
“이걸 왜 보여주세요.”
“세 번째 줄 보시죠.”
지안은 명단을 손가락으로 짚어 내려갔다.
세 번째 줄. 차시헌, 정식 이사, 지분 19.4%.
그 아래 줄에 세온그룹 회장 차동석.
숫자보다 그 이름이 먼저 눈에 박혔다.
“물류 대표라고만 하셨죠.”
“물류 대표도 맞습니다. 정확히는 세온그룹 후계자고요.”
“3년 전 박람회의 심사역은요.”
“제 취미가 아니라 제 훈련이었습니다.”
지안은 종이를 두 번 접었다가 다시 폈다.
접힌 자리에 지분율이 걸려 있었다.
“왜 지금 까요.”
“태건이 오늘 백화점 문을 닫았으니까요.”
시헌은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느긋했다.
“통보서 여섯 장. 제휴몰 검색 제외. 이건 이제 대표님 개인 싸움이 아닙니다. 그룹전이에요.”
“그래서요.”
“태건이랑 싸우려면, 저랑 한 배 타셔야죠.”
지안은 삼 초쯤 그를 봤다.
그 삼 초 동안 계산기가 돌았다.
‘호의는 언제나 청구서로 돌아왔어. 전생에도.’
전생의 첫 청구서는 15억이었고 이자로 브랜드 전체를 가져갔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시헌의 눈이 조금 움직였다.
“의외로 빠르시네요.”
“대신 제가 조항을 씁니다. 볼펜 있어요?”
시헌이 안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건넸다.
지안은 지분 구조표를 뒤집어 여백에 줄을 그었다.
컨테이너 조명이 종이 위로 비스듬히 떨어졌다.
“공동전선 각서. 다섯 줄이에요.”
첫 줄.
“세온은 태건 계열의 요청이나 거래 관계로 아뜰리에 안의 어떤 계약도 해지·유예하지 않는다. 위반 시 지연 1일당 계약 총액 10배. 제19조 적용.”
“이미 있는 조항인데요.”
“이번엔 계약이 아니라 각서에 넣어요. 나중에 세온 부사장님이 다르게 기억하실 수도 있으니까.”
시헌이 짧게 웃었다.
두 번째 줄.
“세온몰 입점. 수수료 12퍼센트, 정산 15일, 반품 귀속 0퍼센트.”
“태건이 32에 60일이었죠.”
“그래서 12예요. 우리 브랜드가 세온몰 매출 만들어주면 협회 대표들 스물 몇 명이 그 숫자를 보게 됩니다. 그게 태건 백화점을 진짜로 때리는 방법이에요.”
“12는 사내에서 못 통과합니다.”
“통과 안 시키셔도 돼요. 후계자 재량으로 결재 한 장 쓰시면 되죠. 오늘 그거 하려고 명단 보여주신 거 아니에요?”
시헌이 짐 받침대 위 서류철을 손끝으로 밀었다.
“쓰세요, 12.”
세 번째 줄.
“태건이 세온에 원청 반환을 미끼로 접근한 사실은 48시간 내 서면 공유.”
“지난주 건은요.”
“지난주에 이미 왔었죠. 부사장님한테.”
시헌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었다.
“어떻게.”
“당신이 대신 받아서 거절했으니까요. 알려주신 건 고맙지만, 그건 호의였고 호의는 다음에 안 올 수도 있어요. 서면은 옵니다.”
네 번째 줄을 쓰는 손이 조금 빨라졌다.
“세온이 아뜰리에 안 지분을 취득하려면, 대표 서지안의 서면 동의 없이는 1퍼센트도 불가.”
시헌이 그 줄을 오래 봤다.
“이 줄이 제일 아프네요.”
“아프게 쓴 거예요.”
“제가 무슨 말을 해도 안 지워주시겠죠.”
“지금은요.”
지안은 다섯 번째 줄에 볼펜을 눌렀다.
“두 회사는 태건 유통 건에 관해 공동으로 공정위에 신고를 제기한다.”
시헌이 고개를 들었다.
“이건 선전포고입니다.”
“오늘 아침에 저쪽이 먼저 했어요. 여섯 장으로.”
“세온 법무가 반대할 겁니다.”
“그럼 각서에 사인하지 마세요. 저 혼자 신고하죠. 대신 이 짐 받침대 위에서 오늘 밤에 정리하고 싶었어요.”
“혼자 신고하면 반년 걸립니다.”
“세온이 붙으면 두 달이겠죠. 계산은 저도 해요.”
지안은 볼펜을 놓았다.
“당신이 후계자라고 밝힌 이유가 나를 지키려는 거면, 지키는 방식은 제가 정해요.”
시헌은 다섯 줄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읽는 동안 컨테이너 안에서 짐 받침대 옮기는 소리가 두 번 울렸다.
“제가 졌으니까 이번엔 제 값을 부르시죠, 라고 했더니.”
시헌이 종이를 손등으로 툭 쳤다.
“진짜 다 부르시네요.”
“싼 편이에요. 3억 태우고 배운 값이니까.”
“그날 사무실 바닥에서요.”
“네.”
시헌이 볼펜을 받아 팔을 뻗었다.
각서 아래 여백에 이름 두 글자를 쓰기 시작할 때, 코트 소매가 손목 위로 밀려 올라갔다.
지안의 눈이 거기서 멈췄다.
사각 케이스.
가죽 시계끈.
다이얼 아래쪽 작은 창 안에서 초침이 한 칸 돌았다.
‘봤어. 어디서.’
이틀 전 신촌 공증사무소, 인화본 여섯 장.
어깨와 손목만 찍힌 남자.
같은 케이스, 같은 시계끈, 같은 창.
“대표님?”
시헌이 사인을 끝내고 볼펜을 내밀었다.
지안은 종이를 받아 반으로 접었다.
손끝이 접힌 선을 두 번 눌렀다.
“아뇨. 사인 확인했어요.”
“뭘 보셨는데 표정이 그러세요.”
“시계요. 그거 어디서 사셨어요?”
시헌이 손목을 슬쩍 돌려 보였다.
“선물 받은 겁니다. 왜요, 취향이십니까?”
“업계에 같은 거 차신 분을 봐서요.”
“흔한 모델입니다. 사각 케이스는 요즘 좀 나오죠.”
‘흔하다.’
지안은 그 단어를 노트에 적지 않았다.
적으면 믿게 될 것 같아서였다.
여덟 시 콜에 유라는 늦지 않았다.
지안은 촬영장 모니터 앞에서 조현우의 서면을 기다렸다.
여섯 시까지 오기로 한 문서는 오지 않았다.
대신 아홉 시 사십 분에 세온 법무팀 대리의 문자가 왔다.
공정위 신고서 초안 준비하겠습니다. 대표님, 다섯 번째 줄 진심이신 거죠?
지안은 답을 짧게 보냈다.
세 번째 줄부터가 진심이에요.
열한 시가 조금 넘어 민아가 전화를 걸어왔다.
“대표님, 단톡방에요.”
“어느 방.”
“동대문 사입 방이랑 협회 방이요. 지금 두 개 동시에 돌아요.”
지안은 촬영장 밖 복도로 나갔다.
민아가 보낸 이미지가 열리는 데 이 초쯤 걸렸다.
화면 저장였다.
노트 낱장 하나가 사진 가운데에 있었다.
2월 물류대란. 3주. 항만 파업. 그 아래 지안의 손글씨.
화면 저장을 올린 계정 이름은 영문 여덟 자였고, 프로필 사진이 태건 유통 사내 행사장 로고였다.
방에는 이미 글이 붙어 있었다.
이거 아직 안 일어난 일이라는데요.
출처 이상한 브랜드라는 말이 이거였네.
지안은 이미지를 두 배로 키웠다.
프로필 로고 아래 행사 연도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대표님, 이거 어떻게 해요. 아침에 상품 기획자가 한 말이랑 똑같아요.”
“똑같아서 좋은 거야.”
“좋아요?”
“프로필 확대해서 따로 저장해. 방 이름, 올라온 시간, 계정, 밑에 붙은 댓글 전부. 화면 저장은 두 사람 폰으로 각각 남기고.”
“고소하실 거예요?”
“오늘 아침 열 시에 그 사람이 전화로 뭐라고 했지.”
“사진 한 장이 참 무섭다고.”
“그게 녹음됐어. 그리고 열한 시에 태건 유통 로고를 달고 그 사진이 업계 방에 뿌려졌어. 이 둘을 나란히 붙이면 뭐가 되지?”
민아가 잠깐 말을 멈췄다.
“심의가 아니라, 지시요.”
“지시보다 더 나가. 거래처 봉쇄에 평판 공격까지 붙은 조직적 방해야. 신고서 첨부자료 3번으로 올려.”
“태건이 왜 이렇게 급하게 흘렸을까요.”
“오늘 여섯 시까지 서면을 못 줘서 그래. 문서로 못 이기니까 소문으로 이기려는 거고.”
민아의 숨소리가 짧아졌다.
“근데 대표님, 저기 적힌 내용은요. 2월 셋째 주요. 사람들이 그걸 물어봐요.”
지안은 복도 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삼 초쯤 봤다.
‘그건 진짜니까 무서운 거지.’
“그건 내가 정리해.”
전화를 끊자마자 화면이 다시 울렸다.
시헌이었다.
“저도 그 방에 있습니다.”
“세온 부사장님이 동대문 사입 방에요?”
“협회 방입니다. 아까 다섯 번째 줄 때문에 법무는 야근이고, 저는 폰만 보고 있었고요.”
“신고서에 첨부할 게 하나 늘었어요. 열한 시 십 분 화면 저장. 계정 프로필이 태건 유통 로고예요.”
“그건 저희한테도 좋습니다.”
시헌의 목소리가 한 톤 내려갔다.
“그런데 대표님. 저 낱장 말입니다. 2월 셋째 주, 항만 파업.”
지안은 복도 벽에 등을 붙였다.
“왜요.”
“제가 세온물류 대표입니다. 노조 협상 테이블은 아직 안 열렸어요. 그런 단어를 쓰는 사람이 업계에 없습니다.”
“그래서요.”
“2월에 진짜 터지면, 대표님 노트가 맞다는 걸 이 업계에서 제일 먼저 아는 사람이 저라는 뜻이죠.”
컨테이너에서 접은 각서가 코트 주머니 안에 그대로 있었다.
지안은 그 종이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접힌 자리가 아직 따뜻했다.
“두 달 있어요.”
“뭐가요.”
“당신이 물어볼 걸 정할 시간, 그리고 내가 대답을 정할 시간.”
“공정합니다.”
“각서에 여섯 번째 줄은 안 씁니다.”
“안 쓰셔도 됩니다. 저도 궁금한 채로 한 배 타는 데 익숙하고요.”
전화를 끊고 지안은 촬영장 문을 열었다.
조명 아래에서 유라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봤다.
셔터가 여덟 번 끊어서 터졌다.
지안은 모니터 옆에 서서 검은 노트를 펼쳤다.
12월 셋째 주 칸 아래 빈 줄에 볼펜을 눌렀다.
2월 3주 항만 파업. 저쪽이 흘리기 전에, 내 이름으로 먼저 공표한다.
날짜와 시간을 적고, 마지막에 한 줄 더 붙였다.
공증 예약, 내일 아침 아홉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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