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판의 법칙11화 / 전 21화0

2부. 갑과 을이 바뀌는 시간

11화. 계산을 벗어난 사람

서지안


못 맞춘다.

지안은 태블릿 화면을 두 번 새로고침 하고 나서야 그 결론을 소리 내어 말했다.

“누적 주문 4만 1,800건. 출고 완료 2만 6,300건.”

컨베이어 위로 택배 스티커가 쏟아졌다.

라벨기 소리가 일정하게 끊겼다 이어졌다.

“남은 시간 다섯 시간. 화물 받침대당 220장으로 잡으면 지금 속도가 시간당 열둘이에요.”

시헌이 패딩 지퍼를 목까지 올렸다.

“열둘이면요.”

“5시간에 예순 화물 받침대. 1만 3,200장. 2,300장이 남아요.”

“2,300장이면 오전에 지연 문자 몇 통쯤이겠네요.”

“2,300장이면 CS 콜 700건이고, 그중 3퍼센트가 취소로 돌아서요.”

지안이 태블릿을 돌려 보여줬다.

“취소 690만, 콜 응대 인건비 120만. 그리고 별점 하나짜리 후기가 서른 개쯤 붙어요. 그게 제일 비싸요.”

시헌이 벽시계를 봤다.

“그럼 열넷으로 올리죠. B라인 야간조 두 명 빼오겠습니다.”

“B라인 화물 주인이 가만있어요?”

“아침에 세온 내부에서 저 욕먹습니다.”

“욕값은 장당 십 원으로 계산해 드릴까요.”

“그건 좀 싸네요.”

지안은 웃지 않고 라인 끝으로 걸어갔다.

화물 받침대에 쌓인 박스 중에서 세 개를 골라 테이프를 뜯었다.

트렌치가 접혀 들어간 모양을 손등으로 눌러 확인했다.

벨트가 몸판 아래로 눌린 채 접혀 있었다.

“이 생산 단위 어디서 왔어요?”

옆에 있던 야간 조장이 태블릿을 확인했다.

“3화물 받침대요. 열일곱 박스.”

“열일곱 박스 전부 다시 싸요.”

조장의 얼굴이 굳었다.

“대표님, 지금 시간당 열넷 맞춰야 하는데 재포장 들어가면요.”

“압니다.”

지안은 벨트를 빼서 몸판 위에 가로로 놓고 다시 접었다.

“이렇게. 벨트는 위로, 소매는 펴서.”

“차이가 큽니까.”

“눌린 자국이 이틀 안에 안 펴져요. 그러면 반품이에요.”

지안이 손을 털었다.

“반품률 1퍼센트면 418건. 왕복 물류에 검품 재포장까지 건당 9,600원. 400만 원이에요. 지금 다시 싸는 게 싸요.”

조장이 무전기를 들었다.

시헌이 옆에 와서 뜯긴 박스를 들여다봤다.

“400만 원 계산이 벨트 접힌 데서 나옵니까.”

“전에 이걸로 3,100건 반품받아 본 적 있어요.”

‘전생에.’

지안은 그 말을 삼키고 태블릿을 다시 켰다.

배송 권역 필터를 걸었다.

제주와 도서 지역, 강원 산간.

“1,140건. 이건 열넷로 올려도 못 맞춰요.”

“포기하십니까.”

“먼저 사과할 거예요.”

지안이 CS 계정을 열었다.

“이 1,140명한테 지금 문자 보내요. 배송 하루 지연 안내하고 3,000원 쿠폰 자동 지급. 342만 원.”

“콜 오기 전에 미리 쓰시는 거군요.”

“콜이 오면 700건이에요. 응대비에 취소까지 붙으면 800만이 넘어요. 342만이 싸고, 쿠폰은 다음 주에 매출로 돌아와요.”

시헌이 잠깐 말이 없었다.

“서 대표님은 사과를 예산으로 쓰시네요.”

“사과는 늦으면 값이 두 배예요.”

두 시 사십 분, 시간당 출고가 열넷을 넘겼다.

지안은 게이트 옆에 서서 화물 받침대가 나가는 걸 하나씩 셌다.

손끝은 택배 스티커 잉크로 검게 물들었다.

세 시 오 분, 마지막 화물 받침대가 A라인 게이트를 통과했다.

라벨기가 멈추고, 그제야 안에 있던 소리들의 정체가 들렸다.

지게차 후진 경고음.

누군가 장갑을 벗어 화물 받침대에 던지는 소리.

정산 예상 화면이 떴다.

하루 매출 9억 8,400만 원.

지안은 숫자를 두 번 읽었다.

‘전생에 이 브랜드가 1년 동안 못 찍은 숫자야.’

시헌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화면을 보다가 지안 쪽으로 돌려 보여줬다.

“4터미널, 새벽 두 시에 물건 수거 멈췄습니다.”

“태건로지스요?”

“화물 주인 물량이 통관에서 걸렸어요. 원단 청구서 단가가 신고분하고 안 맞아서요.”

지안이 눈썹만 올렸다.

“2배로 사들인 그 원단이겠네요.”

“그쪽은 오늘 못 나갑니다. 배정 시간값을 통으로 물었는데, 물류는 배정 시간이 아니라 사람이 굴리는 거라서요.”

“제19조를 안 넣은 사람들이네요.”

시헌이 짧게 웃었다.

그러다 웃음을 지웠다.

“낮에 우리 부사장한테 태건 쪽에서 전화 왔습니다. 아뜰리에 안 배정 시간 빼면 원청 두 개 돌려준다고요.”

“부사장님 답은요.”

“제가 대신 받았습니다.”

“뭐라고요.”

“위약금이 1일당 계약 총액의 10배라서 회사가 망한다고 했습니다.”

“거짓말이네요.”

“조항은 사실이잖습니까.”

두 사람은 빈 컨테이너 문턱에 나란히 앉았다.

시헌이 자판기에서 커피 두 잔을 뽑아 왔다.

지안은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입김이 하얗게 흩어졌다가 사라졌다.

야간조 몇 명이 담배를 피우려 게이트 밖으로 나갔다.

한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시헌이 종이컵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농담기가 목소리에서 전부 빠졌다.

“3년 전 그날, 왜 그 계약서에 사인 안 했는지 아직도 궁금합니다.”

지안의 손이 컵 위에서 멈췄다.

창업 박람회, 부스 번호 47.

명함도 안 주고 계약서(안)만 놓고 간 투자 담당자.

지안은 그 조항들을 세 번 읽었고, 세 번 다 같은 생각을 했다.

‘너무 좋아서 무섭다.’

그리고 그 문서는 지금 지안의 노트 안에 있다.

제17조 문장은 거기서 옮겨 왔다.

말하지 않았다.

“조건이 나빠서가 아니었어요.”

“그럼요.”

“그 계약서를 쓴 사람이 왜 나를 골랐는지 몰랐으니까요.”

지안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유를 모르는 호의는 나중에 청구서로 와요. 금액도 날짜도 안 적힌 채로요.”

시헌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지금은요. 아직도 청구서로 보이십니까.”

“지금은 제19조가 있으니까요.”

“조항이 있으면 믿으시는 겁니까.”

“조항이 있으면 계산이 되니까요.”

시헌이 웃었다.

지안이 예상한 반응이 아니었다.

비웃음도, 서운함도 아니었다.

그 웃음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잠깐 말이 늦어졌다.

2초쯤.

지안은 그 2초를 어디에도 넣을 수 없었다.

‘이 남자는 내 노트 어디에도 없다.’

“대표님은 왜 이걸 물으세요, 지금.”

지안이 컵을 내려놓았다.

“물량 다 나갔는데요. 계약 조건 다시 협상할 자리도 아니고요.”

“물량 다 나갔으니까 물은 겁니다.”

“무슨 뜻이에요.”

“협상 중에 물으면 조건이 되니까요.”

시헌이 일어서서 패딩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제 쪽 이유는 제가 언젠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언젠가는 날짜가 아니에요.”

“지금 말하면 서 대표님이 저를 다시 계약서로 보실 것 같아서요.”

“저는 원래 사람을 계약서로 봐요.”

“알고 있습니다.”

시헌이 차 키를 손에서 한 번 돌렸다.

“3년 전부터.”

지안은 대답을 찾지 못했다.

그가 게이트 쪽으로 걸어갔다.

패딩 어깨에 형광등 빛이 얹혔다가 벗겨졌다.

지안은 그 등을 3초쯤 봤다.

‘3년 전부터, 뭘.’

노트를 꺼냈다.

새 페이지를 열고 볼펜을 쥐었다.

손끝의 택배 스티커 잉크가 종이 위에 옅게 묻었다.

차시헌. 박람회 이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음(추정).

제17조 문장 = 그 계약서(안) = 8월 새벽 문자 발신자.

세 번째 줄을 쓰려고 볼펜을 대는데, 쓸 말이 없었다.

이 남자가 무엇을 원해서 3년을 봤는지.

노트 3년치 어디에도 그 답이 없었다.

지안은 볼펜을 눕혔다.

‘전생에 나는 이 사람을 만난 기억이 없어. 한 번도.’

그게 무섭기보다 이상했다.

무서워야 하는데 이상하기만 한 것이, 계산 밖이었다.

휴대폰이 문턱 위에서 울렸다.

유라의 매니저였다.

두 시간 전에는 촬영 스케줄 확인 문자를 보냈던 번호였다.

지안은 화면을 열었다.

대표님, 죄송한데 지금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유라 씨가 어제 대표님 방에서 찍은 그 노트 사진, 오늘 새벽에 어디로 보낸 것 같습니다.

제 폰으로 백업이 잘못 걸려서 저한테도 넘어왔어요.

받는 사람 이름이 조현우예요.

지안의 손이 멈췄다.

조현우.

성수동에서 봉제 라인 사장을 빼돌리려다 위약금 공증 앞에서 물러난 태건 유통 상품 기획자.

지안은 사진이 몇 장 갔는지 물으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두 번 가고 끊겼다.

다시 걸었다.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가 흘렀다.

게이트 밖에서 시헌의 차가 미등을 켜고 빠져나갔다.

지안은 노트를 덮지도 않고 무릎 위에 그대로 둔 채 세 번째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번에는 신호도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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