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1200룩스
20화. 덮어야 할 얼굴
“언니, 저 지금 올릴 거예요. 지금, 아니 미안, 그게 아니라, 화면에 오빠 얼굴이 그렇게 나왔는데 제가 어떻게.”
무대가 끝난 복도에서 나는 조끼를 벗지도 못하고 그 말을 들었다. 스피커를 타고 넘어온 함성이 아직 벽에서 웅웅거렸다.
“주아 씨. 오늘 밤엔 올리지 마세요.”
“근데.”
“내일 아침에 봐요. 변호사랑 같이.”
전화를 끊고 시계를 보니 열한 시 이십 분이었다. 집에 와서 조끼를 세탁기에 넣고 파우치를 현관 신발장 위에 올려두었다.
새벽 세 시 사십일 분에 눈이 떠졌다. 스무 날 동안 그 시각에 울리던 전화는 오지 않았다. 나는 불을 켜지 않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신발장 위 파우치가 어둠 속에서 각진 덩어리로 보였다. 지퍼를 열면 안에 뭐가 어떤 순서로 들어 있는지 눈 감고도 알았고, 그래서 열지 않았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두 번 끊겼다 이어졌다.
여섯 시 십 분에 현관문을 열었다. 아무도 부르지 않은 문이었다. 복도 센서등이 늦게 켜졌다.
여덟 시 사 분, 지하철역 계단을 절반쯤 내려갔을 때 화면에 그의 이름이 떴다. 뒤에서 번호표 뽑는 기계가 짧게 울었다.
“이름 적었어요.”
목소리가 낮았다. 어제보다 더 잠겨 있었다.
“서재이. 주민번호도 적었고요. 오른손도 보여줬어요.”
“몇 층이에요.”
“이제 기록 남아도 되죠?”
대답 대신 온 질문이었고, 그건 대답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난간 옆으로 비켜서서 사람들을 먼저 보냈다.
삼십 분 뒤에 사진 두 장이 왔다. 첫 장은 판독지였다. 광대뼈 겉면에 아주 얕은 손상, 살 안에 0.3밀리 크기 금속 조각 남아 있음. 두 번째 장은 촬영 화면을 찍은 것이었고, 흰 뼈 선 위에 점 하나가 박혀 있었다. 위를 향해 비스듬했다.
열여드레 전 새벽에 내가 노트에 적어둔 각도였다. 그날 광대 위에서 안쪽으로 딱 하는 소리가 났고, 나는 그게 뭔지 물어보지 못했다. 남의 글씨로 확인된 건 처음이었다.
밑에 두 문장이 더 있었다. 봉합은 다음 주 화요일. 흉은 남고 선은 평생 옅게 보인다.
나는 난간을 잡고 서서 그 두 문장을 세 번 읽었다. 승강장에서 열차가 들어오고 나갔다. 손이 떨렸다. 어제 무대 뒤편에서 화장용 스펀지를 안 들 때는 멀쩡하던 손이었다.
아홉 시 반, 을지로 변호사 사무실 아래 커피집에서 주아를 만났다. 창가 자리였고, 주아 옆에 회색 재킷을 입은 여자가 서류철을 세워두고 앉아 있었다. 명함에 성만 눈에 들어왔다. 주아는 모자를 벗지 않았고, 앞에 놓인 잔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왼손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가 다시 무릎으로 내렸다. 손가락 밑동의 실선 두 개가 잠깐 보였다 사라졌다.
“저 어제 새벽 네 시까지 그 글 보고 있었어요. 미안, 아니, 그게 아니라, 다 써놨거든요. 세 군데 저장해놨고요. 그냥 올리면 되는데.”
“몇 자예요.”
“사천 자쯤요. 날짜도 다 적었고, 그 사람이 저한테 뭐라고 했는지도요.”
“지금 올리면 그건 절차가 아니라 사건이 됩니다.”
변호사가 볼펜 뚜껑을 닫으며 말했다. 주아가 입을 다물었다.
“올리시면 그쪽에서 먼저 하는 건 반박이 아니라 고소예요. 명예훼손으로 걸어놓고, 주아 씨가 답변서 쓰는 동안 자기들은 기사를 정리합니다. 그러면 주아 씨 글은 증거가 아니라 고소당한 사람 진술이 됩니다.”
“그럼 저는 뭘 해요.”
“오늘 진술서 쓰시고, 병원 기록 받으시고, 그 다음에 제가 순서를 정합니다.”
주아가 모자챙을 눌러 내렸다. 옆 테이블에서 사장이 원두 봉지를 뜯는 소리가 났다.
“저는 사람들이 알아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어제 화면에 오빠 얼굴 나왔을 때, 광대 쪽에 그림자가 이상하게 졌잖아요. 저만 알아본 게 아니더라고요.”
“주아 씨.”
나는 파우치 안쪽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테이블 가운데에 놓았다. 안에는 열한째 날 사본에서 칼로 도려낸 종잇조각이 들어 있었다. 스물넷, 방송 순서표 십삼 번, 그리고 그 아래 상처 안쪽 자국이 위를 향해 십칠 도 어긋나 있다는 줄.
“제가 잰 숫자예요. 날짜별로 있고, 어제 병원에서 나온 의사 진단 의견이랑 방향이 맞습니다.”
변호사가 봉투를 열어 조각을 꺼내 보고, 안경을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이거 원본은 어디 있습니까.”
“제 노트에 있어요. 스무 날치 다 있고, 시간까지 적혀 있습니다.”
“찍어놓으신 사진은요.”
“없습니다. 손으로만 적었어요.”
“그게 낫습니다.”
변호사가 조각을 접어 서류철 맨 앞에 끼웠다.
“세상에는 안 넘길 거고요. 필요하면 여기서만 쓰세요.”
주아가 종이 끝을 잡았다. 잡고 한참 아무 말도 못 했다. 어깨가 두 번 올라갔다 내려갔다. 얼굴이 무너지는데 나는 티슈도 꺼내지 않았고, 파우치 지퍼도 열지 않았다. 스무 날 동안 이 자리에서 나는 늘 뭔가를 꺼내 덮었다. 결점 커버 화장품든 의료용 얇은 솜천든 말이든, 먼저 손이 나갔다. 오늘은 그냥 앉아 있었다. 손등이 뜨거워지는데도 무릎 위에 두었다.
“언니는 왜 이걸 적었어요.”
“안 적으면 없던 일이 되니까요.”
“근데 저는 손가락 두 개 이렇게 되고도 아무 데도 안 적었어요.”
주아가 왼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번에는 치우지 않았다. 실선 두 개가 조명 아래에서 하얗게 보였다.
“이제 적으시면 돼요. 여기 앞에서요.”
변호사가 종이 한 장을 밀어주었다. 주아가 볼펜을 받아 들고 첫 줄에 자기 이름을 썼다. 글씨가 흔들려서 받침 하나를 다시 눌러 썼다.
“오빠가 어제 저한테 문자 하나 보냈어요. 밥 먹었냐고.”
주아가 손등으로 눈 밑을 눌렀다. 눌린 자리가 붉어졌다.
“먹었다고 하세요.”
열한 시, 성수동 제작사 회의실 테이블에 계약서가 놓였다. 광고주 이름이 위에 있고, 촬영 기간이 사월 셋째 주부터 넉 달로 인쇄돼 있었다. 담당란에 활자가 박혀 있었다. 메이크업 총괄 문세연.
날짜 칸이 채워져 있었다. 나는 그 줄을 손끝으로 짚었다가 뗐다.
전화가 울렸다. 회의실 밖으로 나가서 받았다.
“문 선생님. 어제 건은 우리 쪽에서 조용히 정리하겠습니다.”
하도균의 목소리는 여전히 매끄러웠다.
“기사는 아침에 두 개 내렸고, 나머지도 오늘 안에 정리됩니다. 선생님 이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업계가 좁습니다.”
“이사님.”
“예.”
“봉합은 다음 주 화요일 열 시고, 병원 이름은 저도 압니다.”
잠깐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나는 끊었다.
회의실로 돌아와 펜을 들었다. 왼쪽 손목 안쪽에 어제 손톱으로 문질러 지운 숫자 자리가 아직 붉게 남아 있었다. 이십오 분 오십 초. 실제로는 이십육 분 십 초쯤이었다. 이십 초 틀렸다.
서명했다. 담당자가 사본을 밀어주었고, 나는 그걸 접지 않고 파우치 안쪽 주머니에 세워서 넣었다. 의료용 얇은 솜천 봉지를 넣어두던 자리였다.
담당자가 통화하러 나간 사이에 노트를 펴서 스무 날 전 장을 찾았다. 왼쪽 칸에 이 사람은, 까지 쓰다가 볼펜으로 문질러 회색이 된 자리가 있었다. 그 밑줄에 이어 적었다.
이 사람은 덮어야 할 얼굴이 아니라 열어둔 채로 곁에 있어야 하는 얼굴이다.
볼펜 끝을 종이에서 뗐다. 문지르지 않았다.
열두 시 사 분에 문자가 왔다.
오늘 밤엔 지울 것도 없는데, 그래도 와요?
창밖으로 지게차가 지나갔다. 나는 답장을 썼다가 지우고 다시 썼다.
여덟 시요. 의료용 얇은 솜천은 제가 가져갈게요.
보내고 나서 연락처 화면을 열었다. 스무 날 전에 저장해둔 이름 하나가 떠 있었다. 그 밑 빈 칸에 손가락을 댔다가, 아무것도 적지 않고 닫았다.
답이 왔다.
문 앞에 있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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