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 후 우리는 서로를 잃는다2화 / 전 21화1

1부 스물하루 전

2화. 이름 없는 얼굴과 미지근한 거즈

문세연


“먼저 확인하시죠.”

일곱 시 십이 분이었다. 스텔라원 사옥 8층 회의실은 창이 동쪽으로 나 있어서 그 시간에 이미 밝았다. 새벽에 지하 3층에서 서명할 때는 펜라이트 하나로 종이 오른쪽 아래만 보였다. 하도균은 긴 테이블 짧은 쪽에 앉았고 나는 그 옆자리에 앉았다. 그가 내 휴대폰을 봉투째 테이블 위로 밀었다. 봉투가 절반쯤 내 앞으로 왔을 때 그 위에 A4 세 부를 겹쳐 얹었다. 봉투 속에서 무언가 눌리는 소리가 났다.

세 시간 전에 내가 이름을 쓴 종이였다. 을 칸의 세 번째 글자가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참여자 명단 없음. 정산은 현금, 주 단위. 출입 기록 남기지 않습니다. 스물한 일 동안 새벽 네 시부터 여섯 시까지, 필요하면 자정 이후 추가. 발설 시 위약금 삼억으로 정리하겠습니다.”

나는 종이를 당겨 읽었다. 위약금 숫자가 두 번째 장 중간에 있었고, 그 아래 문단은 상대방이 누구인지 특정하지 않고 ‘대상 인물’로만 적혀 있었다. 이름이 없는 쪽은 나만이 아니었다.

정산 조항은 첫 장 아래쪽에 두 줄이었다. 금액이 적힌 자리가 비어 있었다.

“금액 칸이 비어 있는데요.”

“주 단위로 봉투에 넣어 드립니다. 첫 주는 금요일 새벽에 가져갑니다.”

“영수는요.”

“안 남깁니다.”

“제가 뭘 근거로 정산을 요구하죠.”

“요구하실 일이 생기지 않게 하겠습니다.”

날짜 칸도 비어 있었다. 새벽에 어두운 데서 볼 때도 비어 있었고, 밝은 데서 보니 폭이 생각보다 넓었다. 언제든 앞으로도 뒤로도 쓸 수 있는 넓이였다.

“날짜는 왜 안 넣습니까.”

“들어갈 날짜가 정해지면 넣습니다.”

에어컨 바람에 종이 모서리가 펄럭였다. 나는 손을 얹어 눌렀다. 8층 복도 쪽에서 누군가 종이컵 두 개를 들고 지나가며 유리에 어깨를 부딪쳤고, 하도균은 그쪽을 보지 않았다.

“원본은 금고에 넣습니다. 나머지는 파쇄하고, 문세연 씨 몫 한 부는 봉투에 넣어 드렸습니다. 사진 찍지 마시고, 사무실 밖에서 펼치지 마시고요.”

“세 부 중에 한 부를 저한테 주시는 겁니까.”

“조건을 모르고 일하시면 서로 곤란해집니다.”

세 번째 장은 이면지처럼 얇았다. 갑 칸에는 회사명만 있고 서명은 없었다. 나는 그걸 두 번 확인했다.

“여기 갑 서명이 없습니다.”

“법인 도장은 그 서류에 안 찍습니다.”

그가 셋째 장을 접어 봉투 입구에 반쯤 밀어 넣었다. 넣다가 손을 멈추고 한 가지를 더 말했다.

“메모도 남기지 마시고요. 종이든 휴대폰이든.”

손가방 안쪽에 노트가 들어 있었다. 새벽에 D-21, 4.2, 아래 2밀리 열, 이물 의심이라고 적은 페이지가 세 번째 장이었다. 나는 손가방 지퍼를 만지지 않았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도균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서류 안쪽에서 네 번째 종이를 꺼내 방향을 돌려 내 앞에 놓았다.

이 년 전 작업 사진이었다. 왼쪽은 처치 전, 오른쪽은 처치 후. 팔에서 떼어 가슴에 붙인 피부의 경계가 6.8센티미터쯤 이어져 있었고, 오른쪽 사진에서는 그 선이 보이지 않았다. 아래에 내 글씨가 있었다. 좌우 톤 차 3퍼센트 이내. 환자 동의를 받아 남긴 기록이었고, 어디에 냈는지도 기억이 났다. 누가 그걸 여기까지 옮겼는지는 몰랐다.

“백 실장님 쪽인가요.”

하도균은 대답 대신 사진을 손끝으로 반 뼘쯤 내 쪽으로 더 밀었다.

“이 사진 때문에 문세연 씨를 불렀습니다.”

“그럼 이건 왜 지금 보여주시는 거죠. 계약은 새벽에 끝났는데요.”

“문세연 씨 이름이 적힌 종이가 세상에 몇 장 있는지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 사진에도 있고, 그 밑에 손글씨도 있고, 병원 쪽에도 한 부 있습니다.”

“환자 동의를 받은 기록입니다.”

“그럼 더 좋습니다. 진짜니까요.”

그가 사진을 다시 뒤집어 자기 앞으로 가져갔다. 뒤집힌 종이 뒷면에 형광등이 비쳐서 왼쪽 사진의 경계선이 희미하게 배어 보였다.

“이 얼굴 얘기가 어디서 새면, 저는 이 사진부터 찾습니다. 그거면 되지 않습니까.”

목이 말랐다. 나는 일어나서 창가 정수기까지 갔다. 종이컵을 뽑아 냉수 쪽 버튼을 누르다가 물이 반쯤 찼을 때 손을 뗐다. 컵을 든 채로 자리로 돌아왔고, 앉아서도 마시지 않았다. 종이컵 바닥이 유리 테이블에 닿는 소리가 생각보다 컸다.

컵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서 얇은 벽이 안쪽으로 눌렸다. 물이 한 번 출렁하고 테두리 밑까지 올라왔다. 나는 힘을 풀고 엄지손톱으로 컵 테두리를 조금씩 접었다. 두 군데를 접고 나서 혀끝을 어금니 안쪽으로 밀어 넣고 입을 다물었다. 참여자 명단, 그 두 음절이 아랫니 뒤에서 걸렸다. 방송 자료에도 안 되고 영상 끝에도 안 되면 한 줄, 스태프 목록 제일 아래 한 줄이면 되는데, 하는 말이 침과 같이 고였고 나는 그걸 삼켰다.

하도균이 봉투 입구를 손바닥으로 눌러 평평하게 만들었다.

“하실 말씀 있으면 지금 하시죠. 서명하셨으니 조건은 못 바꿉니다.”

“없습니다.”

새벽에 들은 말이 그 위에 얹혔다. 이름 없는 사람이 낫다고 했대요, 저 사람들이. 모자챙 아래에서 나온 목소리였고, 그 목소리는 그걸 자기가 골랐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접힌 종이컵을 옆으로 밀었다. 물이 든 채로 밀려서 유리 위에 반원 자국이 남았다.

“이름이 어디에도 안 남습니다.”

하도균이 봉투를 내 쪽으로 반 뼘 밀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제 일은 없었던 얼굴을 만드는 거예요.”

그가 처음으로 웃었다. 입술만 조금 벌어지는 웃음이었고, 눈은 이미 손목시계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 웃음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고, 알아들은 것보다 빨리 봉투를 집었다.

“오후 두 시 촬영은 열두 시에 들어오시죠. 지하 3층 말고 B동으로 들어오시고, 안내 데스크 지나지 마시고요.”

“열두 시에 뵙겠습니다.”

“오늘부터 이 방에서 만나는 일은 없습니다. 여기 기록이 남으니까.”

봉투 아래쪽을 손등으로 훑어 보니 아까 눌린 자리가 아직 접혀 있었다. 나는 봉투를 손가방 위에 얹고 일어났다. 문을 닫기 전에 뒤를 보니 하도균이 남은 종이 두 장을 각을 맞춰 정리하고 있었고, 사진은 그 아래에 끼워져 있었다. 내가 밀어 둔 종이컵은 그대로 있었다.

로비를 나오면서 봉투를 열었다. 휴대폰 화면을 켰다. 부재중 없음, 문자 없음. 시각 7시 41분. 세 시간 반 동안 나를 찾은 사람이 없었다는 뜻이었고, 나는 그 화면을 좀 오래 봤다. 회전문 밖에서 남자 둘이 담배를 나눠 붙이고 있었고, 그중 하나가 이번 주 예고편 편집이 언제 뜨는지 물었다. 다른 하나가 몰라, 위에서 안 준다고 했다. 나는 두 사람 뒤로 돌아 횡단보도까지 걸었다.

버스는 뒷자리가 비어 있었다. 창가에 앉아 손가방을 무릎에 올리고 노트를 꺼냈다. 어제 새벽에 적은 줄 아래에 두 줄을 더 그었다.

21일, 새벽 4시~6시.

정산 현금, 기록 없음.

‘기록 없음’을 적고 나서 볼펜 끝을 뗐다가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오후 2시 사진, 12시 입.

앞자리 아주머니가 창을 손바닥만큼 열었다. 바람이 들어와서 노트 왼쪽 장이 넘어가려 해서 손등으로 눌렀다. 노트를 덮으려고 손을 손가방 안으로 넣었을 때 안쪽 주머니의 지퍼백이 손등에 닿았다. 새벽에 상처 아래를 닦아 넣은 거즈였다. 아직 미지근했다. 지퍼백 안쪽 면에 물방울이 작게 서려 있었고, 갈색으로 번진 자리는 가장자리가 마르면서 테두리가 진해져 있었다. 손등에 닿은 비닐은 손보다 미세하게 따뜻했다. 나는 손등을 뗐다가 다시 대 보았고, 두 번째에도 같았다.

버스가 신호에 걸려 섰다. 나는 그게 증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면서 지퍼백을 꺼내 무릎 위 노트 옆에 놓았다. 갈색 자리가 창으로 든 빛에 비쳐 보였다. 신호가 바뀌고 버스가 출발하면서 몸이 뒤로 밀렸고, 노트가 무릎에서 미끄러졌다. 나는 지퍼백을 먼저 집어 손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그리고 노트를 다시 무릎에 놓고, 21일이라고 쓴 줄 위에 볼펜으로 한 번 더 선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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