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스물하루 전
1화. 이름 없는 사람의 노트
“문세연 씨 맞습니까.”
모르는 번호였다. 시계를 봤다. 세 시 사십일 분이었다.
“맞습니다.”
“방송국 지하 3층, B동 화물 엘리베이터 앞으로 오십시오. 사십 분 안에요.”
주소도, 이름도, 어느 프로그램인지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세면대에서 찬물로 얼굴을 두 번 씻고 화장품 가방을 챙겼다. 화장 붓 통을 열어 세 자루를 빼고 미용 가위를 넣었다. 새벽에 부르는 현장은 대개 둘 중 하나였다. 술 냄새를 지워야 하거나, 멍을 지워야 하거나.
택시가 지하 주차장 경사로를 내려가는 동안 기사가 백미러로 나를 두 번 봤다. 화물 엘리베이터 앞 기둥 옆에 남자가 서 있었다. 정장에 넥타이를 맸는데, 매듭이 새벽 네 시치고 지나치게 반듯했다.
“문세연 씨죠. 하도균입니다.”
그는 명함을 주지 않았다. 대신 손바닥을 폈다.
“휴대폰은 여기 두고 가시죠.”
나는 가방끈을 고쳐 쥐었다. 삼 년 동안 출연진 명단에 이름 한 번 올린 적 없는 사람을 이 시간에 부른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그가 이미 손을 내밀고 있었으므로 폰을 올려놓았다. 그는 그것을 안주머니에 넣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자 서류 두 장을 내밀었다. 볼펜은 이미 뚜껑이 열려 있었다.
“안에서 보시는 건 오늘 이후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명은 여기, 날짜는 비워두시죠.”
“날짜를요.”
“비워두시죠.”
날짜 칸이 빈 계약서는 처음이었다. 나는 이름을 쓰고 볼펜을 돌려줬다. 엘리베이터가 지하 3층에서 멈췄고, 복도 형광등은 절반만 켜져 있었다. 하도균의 구두 소리가 앞서 갔다. 그는 세 번째 문 앞에서 멈춰 손잡이를 잡았다가, 노크 없이 열었다.
안은 어두웠다. 조명 스위치는 문 옆에 있었고 아무도 켜지 않았다. 복도 비상등 빛이 문틈으로 들어와 바닥에 이십 센티쯤 되는 띠를 만들었다. 그 띠 바깥, 거울 앞 회전의자에 검은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앉아 있었다. 벽 쪽으로 몸을 반쯤 튼 자세였다. 하도균이 문을 닫자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만 남았다.
나는 화장품 가방을 화장대 위에 올리고 동그란 조명을 꺼냈다. 스위치에 손을 대는 순간이었다.
“조명은 켜지 말고.”
낮고 느린 목소리였다. 나는 동그란 조명을 도로 넣고 소형 손전등을 꺼냈다. 손바닥으로 빛의 절반을 가린 다음, 모자챙 아래로 밀어 넣었다.
오른쪽 눈꼬리 아래에서 광대뼈 능선까지, 사선으로 갈라진 자리가 빛을 받았다. 나는 자를 대지 않았다. 4.2센티미터. 실은 한 땀도 들어가 있지 않았고, 가장자리가 안쪽으로 말려 있었다. 딱지가 앉은 자리와 아직 젖어 있는 자리가 반반이었다.
병원을 거치지 않은 상처였다.
거울에 그의 얼굴이 반사되지 않도록, 그는 처음부터 각도를 계산해서 앉아 있었다.
“언제요.” 내가 물었다.
“닷새.”
“닷새 동안 아무것도 안 하셨어요?”
“덮을 수 있어요?”
대답 대신 질문이 왔고, 그건 대답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장갑을 꺼내 끼고 왼손으로 그의 턱을 받쳤다. 면도한 지 이틀쯤 지난 감촉이었다. 피부 온도가 높았다. 손끝을 상처 아래로 이 밀리미터쯤 옮기자 거기만 더 뜨거웠다. 열이 몰려 있다는 말을 하려다 삼켰다. 이 방에서 그 말을 들을 사람은 이미 알고 있는 사람뿐이었다.
“고개, 왼쪽으로 조금요.”
그가 움직였다. 나는 소형 손전등 각도를 낮춰 상처의 결을 봤다. 위에서 아래로 그은 자국이라기엔 파인 깊이가 이상했다. 광대 쪽 끝이 더 깊고, 눈꼬리 쪽이 얕았다. 안쪽 어딘가에서 빛이 한 점 되쏘았다. 아주 짧게, 금속처럼.
“여기, 뭐가 남아 있는데요.”
“뭐가.”
“모르겠습니다. 병원에서 보면 알겠죠.”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문 앞의 하도균도 대답하지 않았다. 에어컨이 한 번 멎었다가 다시 돌았다.
자세를 바꾸느라 그의 어깨를 두 번 건드렸다. 왼손은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오른손은 후드 주머니 안이었고, 내가 그를 앞으로 당기는 동안에도, 턱을 들게 하는 동안에도 나오지 않았다. 주머니 천이 손목 위쪽에서 부자연스럽게 두껍게 접혀 있었다. 나는 그 두께를 눈으로 재고 시선을 도로 뺨으로 옮겼다.
“소독은 하고 계세요?”
“응.”
“뭘로요.”
“…약국 거.”
나는 화장품 가방에서 소독한 천을 꺼내 상처 아래 젖은 자리를 눌렀다. 그가 처음으로 숨을 들이켰다. 짧았다.
“아프시면 말씀하세요.”
“안 아파요.”
거즈에 옅게 묻어났다. 나는 그것을 접어서 비닐 주머니에 넣고 화장품 가방 안쪽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하도균이 문 앞에서 시계를 봤다.
“복귀 무대까지 3주입니다. 매일 새벽 네 시부터 여섯 시, 여기로 오시고요. 다른 일정은 잡지 마시죠. 비용은 회사에서 정리하겠습니다.”
“낮 촬영은요. 땀 나는 현장이면 두 시간마다 손봐야 합니다.”
“그때도 부르겠습니다.”
나는 물어야 할 것들을 알고 있었다. 왜 병원이 아닌지. 닷새 동안 왜 아무것도 안 했는지. 회사 전속 팀이 열 명은 될 텐데 왜 나인지. 저 오른손은 왜 계속 주머니에 있는지. 그런데 내 입에서 나온 건 다른 말이었다.
“매일 재도 될까요. 길이랑, 두께요. 적어둬야 해서요.”
짧은 침묵이 있었다. 모자챙 아래에서 그가 처음으로 나를 정면으로 봤다.
“그건 왜 적어요?”
“숫자가 있어야 내일 뭘 쓸지 정해집니다. 오늘 되는 게 사흘 뒤엔 안 되거든요. 살이 굳으면 그 위에 얹는 것도 달라져야 해서요.”
그는 고개를 다시 숙였다. 거절은 아니었다.
나는 화장품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표지가 낡은 A5 노트였고, 앞장 열 몇 장은 다른 얼굴들의 숫자로 차 있었다. 새 장을 폈다. 소형 손전등을 입에 물고, 첫 줄에 4.2cm(센티미터)라고 적었다. 그 아래에 상처 아래쪽 2mm(밀리미터) 열감, 이물 의심이라고 썼다. 맨 위 오른쪽 구석에 D-21이라고 적었다.
노트를 덮는 소리가 이 방에서 제일 컸다.
“오늘은 손 안 대겠습니다. 지금 뭘 얹으면 열이 더 갇힙니다. 아침에 카메라 앞에 서실 일 없으시면요.”
“없어요.” 하도균이 대신 답했다. “오후 두 시에 사진 하나 있습니다.”
“그럼 열두 시에 오겠습니다.”
나는 장갑을 벗어 주머니에 넣고 화장품 가방 지퍼를 올렸다. 하도균이 문을 열어줬다. 복도 빛이 바닥의 띠를 넓혔고, 의자에 앉은 남자는 그만큼 몸을 더 벽 쪽으로 돌렸다.
문턱을 넘기 전에 나는 멈췄다.
“하나만 여쭐게요. 왜 저예요?”
하도균이 안주머니에서 내 휴대폰을 꺼내 내밀었다. 화면은 꺼져 있었다.
“내려가시는 길에 로비 말고 화물 쪽으로 나가시죠.”
대답이 아니었다. 나는 폰을 받아 쥐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모자챙 아래로 얼굴을 감춘 채 그가 말했다.
“이름 없는 사람이 낫다고 했대요, 저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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