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 후 우리는 서로를 잃는다15화 / 전 21화0

3부 지운 자리

15화. 갓 칠한 벽 냄새와 반 톤의 두께

문세연


성수동 3관은 갓 칠한 벽 냄새가 났다. 헤드 네 개가 다 켜지자 그 냄새가 더 진해졌고, 조명 뒤에서 팬이 낮게 돌았다. 빛 측정기를 든 조명팀 막내가 배우 얼굴 앞에 판을 대고 숫자를 읽었다.

“천오백 넘습니다.”

“눈으로 보면 그렇게 안 밝은데.”

감독 옆에 선 광고주 쪽 사람이 말했다. 막내가 판을 한 뼘 옮기고 다시 읽었다.

“천오백사십입니다. 숫자는 거짓말 안 해요.”

스무 날 동안 나도 그 말로 살았다. 눈이 속아도 숫자는 속지 않는다. 톤은 반 톤 단위로 적고, 두께는 밀리로 적고, 시간은 분으로 적는다. 노트에 적어두면 다음 새벽에 그 숫자가 나를 기다린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배우는 스물다섯이었다. 화장품 광고였고, 두 시간 뒤에 확대 촬영으로 뺨만 화면을 채우게 되어 있었다. 나는 접이식 의자를 끌어다 그 앞에 앉았다.

이 자리는 사흘 전에 잡혔다. 예전에 두 번 같이 한 실장이 전화로 사람이 갑자기 빠졌다고 했고, 나는 스케줄 확인하는 척 삼 초를 쉬고 된다고 했다. 확인할 스케줄은 없었다. 새벽 네 시에 나가던 곳이 없어졌고, 그 자리를 채울 이유도 없어졌다. 계약서에는 해지 사유를 발설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었고, 나는 잘렸다는 말도 못 하는 사람이 되어 성수동까지 지하철로 왔다.

왼손으로 턱을 받쳤다. 피부 온도가 정상이었다. 손끝이 저절로 오른 광대 아래로 갔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부푼 자리도, 판도, 밤이 되면 몰리는 열도 없었다. 살이 얇게 눌렸다가 그대로 돌아왔다.

브러시를 들었다. 각도가 서지 않았다. 십오 도를 어디서부터 재야 하는지 몰라서 손목이 허공에서 두 번 흔들렸다.

“선생님?”

배우가 눈을 떴다. 속눈썹 사이로 나를 올려다봤다.

“저 톤 떴어요?”

“아니요.”

브러시를 팔레트에 내려놓았다. 나무 손잡이가 플라스틱에 닿는 소리가 났다. 내 손에서 난 소리 같지 않았다.

조감독이 뒤에서 지나가며 손목시계를 두드렸다.

“삼십 분 뒤에 들어갑니다. 컨셉 밝게요.”

나는 팔을 무릎에 올리고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 눌렀다. 떨림은 손가락이 아니라 손목 안쪽에서 왔다. 맥이 뛰는 자리보다 조금 위였다. 스무 날의 새벽 동안 이 손이 배운 것은 사 점 이 센티미터짜리 자리 하나였다. 눈꼬리 아래에서 시작해 광대까지, 위쪽은 얕고 아래쪽은 깊고, 경계선은 아래에서 위로 쓸어 올려야 뜨지 않는 자리. 그 자리가 없는 얼굴 앞에서 손은 갈 곳을 찾지 못했다.

배우가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오 분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대기실 쪽 모니터에 음악방송 채널이 걸려 있었다. 자막이 아래로 지나갔다. 사흘 뒤 복귀, 사전 공개 예고 영상과 제작 발표회 연습 현장 일부 공개. 스태프 둘이 그 앞에 섰다.

“얼굴 미쳤다. 삼 년 쉬고 저게 되냐.”

“관리 받은 얼굴이지.”

나는 종이컵을 든 채로 두 걸음 다가갔다. 화면 오른쪽 아래만 봤다. 광대에 아무것도 없었다. 경계선도, 실금도, 판이 밀어낸 그림자도 없었다. 스물세 초짜리 영상에서 그가 웃는 컷이 네 번이었다. 네 번 다 오른쪽 입꼬리가 반만 올라갔다. 마이크는 왼손에 있었고, 오른손은 코트 주머니 안에 있었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도 내가 시킨 대로 얼굴을 쓰고 있었다.

예고 영상이 끝나자 연습 짧은 영상이 붙었다. 무대는 아직 세트가 절반이었고, 조명은 연습 값이었다. 천 빛 밝기 단위. 카메라가 왼쪽 사이드에서만 돌았다. 오른쪽으로 넘어오는 컷이 한 번도 없었다. 그가 몸을 돌릴 때 플로어에서 누군가 손을 들어 각도를 잡아주었고, 그는 그 손을 보지 않고 각도를 맞췄다. 십오 도. 말하지 않아도 맞추는 각도였다.

“저건 은주 실장님 손이지.”

내 보조로 붙은 애가 옆에서 말했다. 3관 사람은 아니고, 오늘만 온 애였다.

“그렇네요.”

“본사에서 한 팀 다 들어갔다던데요. 복귀 무대까지 실장님이 직접 얼굴 잡는대요.”

“그래요.”

“선생님도 요즘 큰 데 하나 붙으셨다면서요. 소문 돌던데.”

“아니에요.”

“에이. 새벽마다 어디 나가신다고 들었는데.”

“잘못 들으신 거예요.”

애는 웃고 커피를 마시러 갔다. 소문은 아직 나보다 뒤늦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 큰 데는 나흘 전에 끝났고, 끝났다는 말은 나 말고 아무도 하지 않게 되어 있었다. 통장에는 이번 달 정산이 들어왔고, 다음 달에 들어올 것은 없었다.

연습 짧은 영상이 다시 처음부터 돌았다. 나는 화면을 보고 있었다. 경계선을 쓸어 올린 방향이 반대였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 깔았고, 그래서 삼십 초 안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마지막 컷에서 뺨 톤이 목보다 반 톤 두껍게 앉아 있었다. 눈에 걸릴 두께는 아니었다. 이 방에서 그걸 알아볼 사람은 나 하나였고, 그 반 톤이 무엇을 누르고 있는지 아는 사람도 나 하나였다. 어제 아침에 일 점 이였으면 오늘 새벽엔 일 점 삼이나 일 점 사. 하루 이 밀리로 올라간 지 엿새째. 오른쪽 입꼬리는 이미 다 안 올라간다. 저 반 톤은 그걸 눌러 앉힌 두께였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그 앞에 없어도 숫자는 혼자 올라간다.

연습 조명은 천이었다. 본 무대는 천이백이다. 나는 종이컵의 커피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채 들고 서 있었다.

“선생님, 손 왜 그러세요.”

배우 목소리였다. 나는 어느새 자리로 돌아와 앉아 있었고, 브러시를 목이 아니라 몸통 가운데를 쥐고 있었다. 그 상태로는 각도가 나올 리 없었다.

“죄송합니다. 잠깐만요.”

화장실 세면대에서 찬물을 틀었다. 손목 안쪽을 물줄기 밑에 대고 삼십 초쯤 두었다. 물이 미지근해서 수도를 더 돌렸다. 헤어 쪽 스태프가 들어와 옆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여기 온수 잘 안 나와요.”

“괜찮아요. 찬물 쓰려고요.”

스태프는 손등을 두어 번 털고 페이퍼타월을 뽑아 쓰고 나갔다. 문이 닫히면서 복도 소음이 잘렸고, 물소리만 남았다.

파우치는 세면대 옆에 세워뒀다. 안쪽 주머니에 지퍼백이 아직 서 있었다. 갈색으로 마른 거즈가 든 것, 그날 쓴 퍼프가 든 것. 노트도 그대로 있었다. 수도를 잠그고 젖은 손을 티슈로 닦고 노트를 꺼내 뒷장을 폈다. 여백에 날짜가 하나 적혀 있었다. 사흘 뒤였다. 아무 설명도 붙이지 않은 숫자였다. 그 뒤로는 빈 줄이었다. 부푼 높이 칸도, 열이 몰린 자리 칸도, 조명 칸도 나흘째 비어 있었다. 비운 게 아니라 적을 것이 오지 않았다. 나는 그 위에 손을 대지 않고 노트를 덮었다. 파우치 지퍼를 올리고 어깨에 걸었다.

복도로 나오니 케이터링 테이블 앞에 조명팀 셋이 서서 김밥을 먹고 있었고, 3관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안에서는 헤드를 두 개 빼고 스탠드를 옮기는 중이었다. 배우 의자는 비어 있었다. 조감독이 케이블을 넘어오며 대기실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조명 다시 잡을 거라 십 분만 더 쓰세요.”

대기실 소파에 배우가 다리를 접고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나는 파우치를 내려놓고 그 앞 스툴에 앉아 왼손으로 턱을 받쳤다.

“조금만 더 걸릴게요.”

“천천히 하세요. 어차피 조명 다시 잡는대요.”

배우가 휴대폰을 뒤집어 무릎에 놓았다.

“선생님, 저 그런데 아까 모니터 보실 때 표정이 좀.”

“어땠어요.”

“화난 사람 같았어요.”

“화난 거 아니에요.”

“그럼요?”

“숫자 세고 있었어요.”

배우가 웃었다. 무슨 뜻인지 묻지 않았고,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브러시를 들었다. 이번엔 목을 쥐었다. 광대뼈 위쪽에 입체감 화장품을 얹었다. 한 번. 손목이 흔들리지 않게 팔꿈치를 옆구리에 붙였다. 두 번. 여기는 덮을 것이 없으니까 얇게, 살이 밀리지 않게. 세 번째를 얹기 전에 손등에 여분을 털었다. 삼 년 동안 남의 얼굴을 만지면서 이만큼 오래 걸린 세 번은 없었다.

“끝났습니다.”

배우가 거울 대신 모니터를 봤다. 조명이 다시 들어오고 그 얼굴이 화면을 채웠다. 오십 밀리였다. 뺨 표면의 잔털까지 잡히는 컷이었다. 나는 오른쪽 아래를 봤다. 거기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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