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은 밤새 갈아야 한다18화 / 전 18화0

5부 남은 불

18화. 꺼지지 않는 밑불의 밤완결

서지안


책상 위에는 세 권의 노트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표지 색이 조금씩 달랐다. 첫 권은 손때에 절어 겉장이 검게 번들거렸고, 둘째 권은 모서리가 물에 한번 젖었다 마른 자국으로 우글거렸으며, 셋째 권은 뒤표지 안쪽이 아직 한 겹 들떠 있었다. 그 옆에 편지를 펴두었다. 몇 번을 손바닥으로 밀어도 종이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네 줄의 골은 완전히 펴지지 않았다. 나는 형광등을 끄고 스탠드만 남겼다. 노란 빛이 종이 위에 동그랗게 고였고, 그 원 밖으로는 방이 어두웠다.

노트북을 열었다. 커서가 흰 화면 왼쪽 위에서 규칙적으로 켜졌다 꺼졌다. 한참을 그 깜빡임만 보다가 손을 얹었다. 2005년 겨울, 엄마는 새벽마다 연탄을 갈았다. 그 한 줄을 치고 손을 멈췄다. 스무 해 동안 나는 이 문장을 어딘가에 적힌 청구서의 첫 줄로 읽어왔다. 이자와 월세와 연탄값 위에 얹힌 첫 항목. 그런데 편지를 읽은 뒤로는 그렇게 읽히지 않았다. 니 덕에 살았다, 그 다섯 글자가 화면 위에 자꾸 겹쳤다. 나는 노트북을 도로 닫을 뻔했다.

그때 협탁에서 휴대폰이 울었다. 화면에 엄마 이름이 떠올랐다. 예전 같으면 손바닥으로 화면을 눌러 불빛을 죽였을 것이다. 나는 그러지 않고 손가락을 밀어 전화를 받았다.

“지안아, 뭐 하노. 밥은 뭇나.”

지팡이를 짚고도 아직 골목을 걷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숨이 조금 차 있었지만 말끝은 여전히 툭툭 끊겼다.

“쓰고 있어, 엄마. 그때 얘기.”

수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해졌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같은 게 옅게 넘어왔다.

“그런 거 써서 뭐 하노. 다 지난 거를.”

나는 한 박자 늦게 답했다. 늘 그랬다. 엄마가 무언가를 물으면 나는 언제나 반 박자쯤 뒤에 입을 열었다.

“지난 게 아니라서 쓰는 거야. 안 그러면 아무도 모르잖아.”

말이 나가고 나서야 그게 며칠 전 미자 이모네 화덕 앞에서 삼켰던 말이라는 걸 알았다. 코 훌쩍이는 소리가 넘어왔다. 엄마는 그 소리를 감기로 덮으려 했다.

“됐다 마, 감기 걸린다, 얼른 자라.”

먼저 끊는 쪽은 늘 엄마였다. 통화 기록에 방금의 시간이 남았다. 이 분 남짓. 나는 그 숫자를 한동안 들여다보다 휴대폰을 엎지 않고 화면이 스스로 어두워지도록 두었다.

전화를 내려놓고 둘째 권을 다시 폈다. 늦봄 페이지에서 손이 멈췄다. 아랫줄, 잉크가 번져 끝내 읽지 못한 그 한 문장이 여전히 거기 있었다. 물 한 방울이 떨어졌던 것인지 눈물이었는지, 글자들은 서로 몸을 섞어버려 무슨 획이 무슨 획인지 가릴 수 없었다. 손끝으로 그 자리를 문질렀다. 종이의 우툴두툴한 결만 지문에 걸릴 뿐, 글자는 끝까지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나는 이 한 줄을 어떻게든 읽어내려 스탠드에 종이를 비춰보고, 각도를 틀어보고, 결국 읽지 못했다는 사실에 밤을 새웠을 것이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엄마가 무엇을 쓰다 멈췄는지 모른다는 것이 또 하나의 미안함으로 얹혔을 것이다. 나는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읽히지 않는 한 줄도 엄마가 그날 밤 앉아서 눌러 쓴 것이었다. 지워진 채로 남은 것도 기록이었다. 나는 그 자리를 덮지 않고 페이지를 편 채로 책상 위에 그대로 두었다.

창가로 갔다. 블라인드 줄을 당기자 슬랫이 접히며 바깥이 열렸다. 서울의 골목에는 곱창 냄새도, 연탄재 삭는 냄새도 없었다. 마주 보이는 빌라의 창들은 대부분 꺼져 있었다. 그런데 삼 층 어디쯤, 창 하나에 불이 켜져 있었다. 누가 저 시간까지 깨어 무엇을 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불이 밤새 그렇게 켜져 있으리라는 것만 알았다.

안지랑 골목의 새벽이 떠올랐다. 화덕 아래 밑불이 사위기 전에 엄마는 새 연탄을 물려 넣었다. 한 번 꺼지면 다시 붙이기 힘들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오래도록 곱창 굽는 요령쯤으로 들었는데, 이제는 그게 요령이 아니라 방식이었다는 걸 안다. 꺼뜨리지 않으려고 자다 말고 일어나는 사람의 방식.

나는 블라인드를 반쯤만 걷어두고 자리로 돌아왔다. 스탠드는 끄지 않았다.

장롱 밑에 아직 노트들이 남아 있었다. 노끈으로 묶어 도로 밀어 넣을 때, 내 손이 지은 매듭은 엄마가 지어둔 매듭과 어딘가 달랐다. 그 안에 서문시장의 새벽이 어떻게 적혀 있을지, 아니면 미자 이모의 말처럼 노트에도 옮기지 못한 채 비어 있을지 나는 아직 모른다. 두 시간만 자고 좌판으로 나가던 밤들이 문장이 되지 못하고 그냥 지워졌을 수도 있었다. 그 빈 자리까지 읽으러 가야 했다. 이번엔 도망이 아니라, 밥을 얻어먹으러, 그리고 나머지 노트를 안고 오려고.

다음 주말 표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커서를 첫 문장 끝으로 옮겼다. 마침표 뒤에 커서가 다시 깜빡였다. 손을 얹었다. 이번엔 멈추지 않았다. 갚는 대신, 나는 그 겨울을 이어 적기 시작했다. 미자 이모가 화덕 앞에 쪼그려 앉아 가르쳐준 것처럼, 밑불을 넘겨받은 사람은 밤새 그 불을 갈아야 한다.

창밖은 어두웠다. 마주 보이는 창의 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고, 책상 위 스탠드의 노란 원도 종이 위에 그대로 고여 있었다. 나는 자판 위에서 손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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