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남은 불
17화. 식지 않은 노란 도시락
서울로 올라가는 날이었다.
옛집 부엌은 여전히 좁았다. 싱크대와 냉장고 사이에 사람 하나 설 자리밖에 없어서, 엄마가 그 자리에 서면 나는 문턱에 걸쳐 서야 했다. 엄마는 지팡이를 벽에 세워두고 찬장 맨 위 칸으로 손을 뻗었다. 수술한 다리로 몸을 지탱하며 까치발을 들려는 것이 보였다.
“내가 꺼낼게. 뭐 꺼낼 건데.”
“저 뒤에, 신문지 싼 거.”
나는 문턱을 넘어 손을 뻗었다. 엄마 손이 닿지 않던 안쪽 깊은 데, 그릇들 뒤로 밀려난 자리에 신문지 뭉치가 있었다. 꺼내 안으니 생각보다 가벼웠다. 신문지를 벗기자 노란색이 드러났다. 뚜껑의 칠이 군데군데 벗겨지고 한쪽 모서리가 눌린, 스무 해 전 그 보온도시락이었다.
나는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한참 들여다봤다.
“이거 아직도 있었네.”
“버릴라 카다가. 그냥 뒀다 아이가.”
엄마는 내 손에서 도시락을 가져가 뚜껑을 열었다. 안쪽에 먼지가 앉아 있었다. 엄마는 그것을 싱크대로 가져가 물을 틀고 씻기 시작했다. 수세미로 뚜껑 안쪽을 문지르는 손이 익숙했다.
“멀쩡한 거를 와 버리노.”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엄마는 그 시절에 이미 알고 있었다. 도시락이 어디로 갔는지, 학교 뒤 어느 덤불에 던져졌는지. 노트에 그렇게 적혀 있었으니까. 알면서도 이십 년을 버리지 못한 손이 지금 물기를 닦고 있었다. 나는 그 손을 봤다. 오른손등의 흉터가 마른행주에 닿을 때마다 빛을 받아 도드라졌다.
엄마는 쌀을 씻어 압력솥에 안쳤다. 물을 손등으로 재는 버릇은 그대로였다. 손가락 마디까지 물이 올라오면 됐다는 듯 뚜껑을 돌려 잠갔다. 불을 올리고, 도마를 꺼내고, 냉장고 문을 열어 단무지 봉지를 뒤졌다.
“거 앉아라. 뭐 할 것도 없다.”
“내가 할게. 엄마 다리.”
“됐다. 니가 하면 김밥이 터진다. 옛날부터 손끝이 야물지가 몬해가.”
나는 문턱에 도로 걸터앉았다. 엄마는 도마 앞에서 다리를 반쯤 벌리고 섰다. 수술한 쪽 무릎을 싱크대 아래 문짝에 슬쩍 기대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몸을 받쳐두고 단무지를 길게 갈랐다. 칼이 도마에 닿는 소리가 좁은 부엌에 또박또박 울렸다.
계란 두 개를 깨서 젓가락으로 풀었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자 기름 냄새가 먼저 올라오고, 지단이 익으면서 고소한 냄새가 그 위에 얹혔다. 엄마는 지단을 접어 팬 한쪽으로 밀어두고, 데친 시금치를 손으로 꼭 짰다. 파란 물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 흉터를 타고 내려갔다.
“참기름이 오데 갔노.”
“이거.”
나는 찬장 아래 칸에서 병을 찾아 건넸다. 엄마는 뚜껑을 열어 시금치에 몇 방울 떨어뜨리고 소금을 조금 뿌렸다. 김밥 재료라고 할 것도 없는 단출한 속이었다. 단무지, 지단, 시금치. 그게 다였다.
“옛날에는 맛살도 넣고 우엉도 넣고 했는데.”
“그때는 뭐 그리 넣을 게 있었나. 지금이 낫지.”
압력솥 추가 돌기 시작했다. 김이 새며 쇳소리를 냈다. 엄마는 불을 줄이고 도마 위를 행주로 닦았다. 밥이 뜸 드는 동안 부엌에는 쌀 익는 냄새와 참기름 냄새가 함께 차올랐다. 나는 그 냄새 속에 앉아 엄마의 등을 봤다. 예전보다 좁아진 등이었다. 화덕 앞에서 곱창을 뒤집던 그 등이, 지금은 싱크대에 절반쯤 기댄 채 김밥 속을 정리하고 있었다.
솥뚜껑을 열자 흰 김이 얼굴까지 올라왔다. 엄마는 주걱으로 밥을 뒤집어 김을 빼고, 김발 없이 김을 손바닥에 펴 그 위에 밥을 얇게 눌렀다.
손등의 흉터가 김을 누를 때마다 접혔다 펴졌다. 나는 문턱에 서서 그걸 봤다. 그 겨울, 졸음에 눌려 연탄을 갈다 덴 자리. 병원비가 아까워 된장을 바르고 헝겊을 감은 채 다음 날도 화덕 앞에 앉았던 손. 그 손이 지금 계란과 단무지를 밥 위에 얹고 있었다.
“밥은 뭇나. 기차에서 배고프다.”
“안 고파, 엄마.”
“됐다 마. 싸주면 무라.”
나는 더 우기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냄새가 밴다고, 무겁다고 했을 것이다. 손사래를 치고 골목을 빙 돌아 나갔을 것이다. 엄마가 김밥을 썰어 도시락 안에 차곡차곡 눕히는 동안 나는 두 손을 내밀었다. 엄마가 뚜껑을 닫고 그것을 내 손 위에 올려주었다. 미안해서 받는 것이 아니었다. 갚아야 할 것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빚이 아니니까 갚을 것이 없고, 죄가 아니니까 빌 것이 없었다. 나는 그냥 받았다.
엄마는 동대구역까지 따라 나오지 않았다. 골목 어귀, 옛날 순이네가 있던 자리 근처에서 걸음을 멈췄다. 통유리 카페 앞이었다. 지팡이에 몸을 기댄 채 손을 한 번 들었다.
“전화해라. 도착하마.”
“응.”
그 짧은 말이 이제 무섭지 않았다. 도착하면 전화하라는 말. 밥은 먹었냐는 말. 예전에는 그 말들이 갚아야 할 청구서처럼 들렸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기 전에 끊게 만들던 말들이었다. 나는 손을 들어 마주 흔들었다. 엄마는 내가 골목 끝을 돌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기차가 출발했다. 나는 노란 도시락을 무릎에 얹었다. 손바닥에 온기가 남아 있었다. 방금 지은 밥의 열이 김을 통해 뚜껑까지 올라와 있었다. 창밖으로 대구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아파트가 지나가고, 낮은 지붕들이 지나가고, 겨울 논이 지나갔다.
나는 뚜껑을 열지 않은 채 그 위에 손을 올려두었다. 장롱 밑에 아직 남아 있는 노트들을 떠올렸다. 서문시장의 새벽이 그 안에 어떻게 적혀 있을지, 아니면 아예 적히지 않은 채 비어 있을지. 곧 다시 내려와야 했다. 이번에는 도망이 아니라, 밥을 얻어먹으러.
김 냄새가 무릎에서 올라왔다. 연기가 밴 그 냄새를 나는 오래 들이마셨다. 예전 같으면 옆자리 사람이 맡을까 봐 도시락을 가방 깊이 밀어 넣었을 것이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손바닥 아래에서 온기가 조금씩 식어갔다. 완전히 식기 전에, 나는 도착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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