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녹은 자리
18화. 녹아 사라진 자리에 남은 서늘함완결
계산대 옆 상자는 무릎 높이도 안 됐다. 사탕이 색깔별로 칸을 나눠 담겨 있었고, 그중 한 칸만 흰색이었다. 나는 냉장 진열대에서 우유를 꺼내고, 식빵을 집었다. 형광등이 조금 낮게 웅웅거렸고, 온장고에서 데워지는 캔커피 냄새가 옅게 돌았다. 우유와 식빵을 계산대에 먼저 올렸다. 손이 그다음에 그 흰 칸으로 갔다. 박하 알사탕 한 봉지를 우유 위에 얹는 동안, 내가 그걸 집었다는 걸 나는 뒤늦게 알았다.
아르바이트생이 봉지를 들어 바코드를 찍었다. 한 번에 안 읽혔는지 뒤집어 다시 찍었다. 삑, 소리가 두 번 났다.
“이거 하나 더 드릴까요. 지금 두 개에 천 원이라.”
“하나면 돼요.”
그가 어깨를 한 번 들었다 놓고 봉지를 담았다. 우유와 식빵 사이에 사탕이 눌려 들어갔다. 나는 봉투를 받아 들고 나왔다. 유리문이 닫히면서 안쪽의 웅웅거리는 소리가 뚝 끊겼다. 이사 온 지 석 달째인데도 이 동네의 저녁은 아직 방향이 헷갈렸다. 간판 불빛이 어느 쪽에서 더 많이 켜지는지로 나는 번화한 쪽을 가늠했다. 정류장은 편의점에서 왼쪽으로 조금 내려간 자리에 있었다.
버스는 비어 있었다. 창가에 앉아 봉투를 무릎에 올리고 사탕 봉지를 꺼냈다. 위쪽을 손톱으로 뜯자 얇은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나는 오래 들어 온 사람이었다. 지운의 회색 코트 오른쪽 주머니에서 이 소리가 났었다. 그가 방에서 나올 때 방문 틈으로도 흘러나왔고, 병원 대기실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던 날에는 내 왼쪽 어깨 옆에서 났다. 소리는 늘 그의 손끝에서 시작됐다. 그 손이 여기 없다는 걸 나는 봉지를 다 뜯고 나서야 실감했다.
알사탕 하나를 혀 위에 올렸다. 서늘한 것이 먼저 왔다. 단맛은 한 박자 늦게 뒤따라왔다. 혀 밑으로 굴리자 모서리가 아랫니에 한 번 부딪혔다가 다시 안쪽으로 미끄러졌다. 나는 사탕을 이쪽 볼로 밀었다가 저쪽 볼로 밀었다.
창밖으로 처음 보는 간판들이 지나갔다. 어느 미용실, 이름을 줄여 쓴 분식집, 셔터를 반쯤 내린 문구점. 나는 그것들을 읽으면서 지운의 손등을 떠올렸다. 청사 계단에서, 벤치에서, 버스에 오르던 그의 손등에 붉은 점 하나가 있었다. 내 검지에서 옮겨 붙은 인주였다. 나중에 지운다던 그 점을 그는 지우지 않고 버스에 탔다. 지금쯤 그 점이 어디서 지워졌을지, 세면대에서 비누로 문질러 사라졌을지, 아니면 며칠 두었다가 저절로 옅어져 없어졌을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물어볼 사람도 이제 없었다.
못에 걸려 있던 회색 코트는 두 달 전에 없어졌다. 지운의 후배라는 사람이 왔다. 나는 그를 방까지 들이지 않고 현관에서 옷을 건넸다. 그가 코트를 반으로 접어 팔에 걸치는 동안 오른쪽 주머니 쪽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사탕 통은 이미 지운이 가져간 뒤였다. 후배가 돌아가고 나서 나는 작은방 문을 열었다. 반년도 아니고 몇 년을 닫아 두었던 문이었다. 안에서 갇혀 있던 공기가 서늘하게 밀려 나왔다. 창을 열어 두고 나는 한참 문지방에 서 있었다.
거실의 종이 상자 두 개는 아직 그 자리에 있다. 지운 몫의 두 개가 빠진 다음부터 남은 것들이었다. 봉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은 채 두었더니 어느 날 그 위가 평평해 보였다. 나는 화분 두 개를 사다가 올려 두었다. 스킨답서스와 이름을 모르는 잎 넓은 것 하나. 물을 주면 상자 종이가 얼룩질까 봐 아래에 접시를 받쳤다. 이제 그 상자들은 상자가 아니라 받침이었다. 언제 치울지는 여전히 정하지 않았다.
사탕이 반쯤 녹아 얇아졌다. 혀 밑에서 굴리면 모서리가 둥글게 닳아 있었다. 안내 방송이 내가 내릴 정류장을 불렀다. 나는 벨 쪽으로 손을 올리지 않았다.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기보다, 올릴 이유를 찾지 못한 손이 그대로 무릎 위에 있었다.
한 정거장을 더 갔다. 낯선 버스에서 내릴 곳을 지나쳐 보는 건 오래전에 이미 해 본 일이었다. 그때는 사탕이 녹는 시간을 더 붙들고 싶어서 그랬다. 오늘은 무엇 때문인지 나도 정확히는 몰랐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를 등 뒤로 들으며 나는 내려섰다.
처음 보는 골목이었다. 입구에 세탁소가 있었다. 유리문 안쪽에 비닐을 씌운 옷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려 있었고, 안쪽에서 스팀 다리미가 한 번씩 쉭 소리를 냈다. 문틈으로 데운 물 냄새와 풀 먹인 천 냄새가 새어 나왔다. 주인은 보이지 않고, 걸린 옷들만 천장 레일을 따라 조금씩 흔들렸다. 나는 유리 너머로 비닐 안에 갇힌 코트 하나를 잠깐 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안쪽에 오래된 열쇠 가게가 있었다.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좁은 가게였고, 벽에 열쇠 뭉치가 크기별로 걸려 은빛으로 낮게 반짝였다. 진열창에는 도장 새김도 한다는 종이가 색이 바랜 채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테이프 끝이 말려 올라와 종이가 앞으로 조금 배가 나와 있었다. 도장, 이라는 글자를 나는 잠깐 들여다보다가 지나쳤다. 가방 안쪽 주머니에는 인주를 닦지 않은 회양목 도장이 아직 그대로 들어 있었다. 그걸 어디에 다시 쓰게 될지 나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골목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좁아졌다. 낮은 담이 이어졌고, 어느 집 대문 앞에는 물기 빠진 화분이 줄지어 나와 있었다. 늦은 시간이라 문을 연 집은 없었고, 골목 안쪽 어느 창에서만 파란 텔레비전 불빛이 새어 나왔다. 발소리가 담벼락에 부딪혀 조금 크게 되돌아왔다. 나는 천천히 걸었다.
어느 집 담 너머로 마른 감나무 가지가 넘어와 있었다. 잎은 다 지고 가지 끝에 감 하나가 쭈그러진 채 매달려 있었다. 새가 먹다 만 자리가 검게 파여 있었다. 나는 그 아래를 지나며 걸음을 늦췄다. 바람이 한 번 지나가자 가지가 얕게 흔들렸고, 감은 떨어지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엄마 번호를 띄워 놓고 통화 버튼 위에 엄지를 올렸다. 아직 하지 않은 말이 있었다. 지운과 어떻게 됐는지, 지난겨울에 무슨 서류에 도장을 찍었는지, 나는 여태 말하지 않았다. 지운의 안부를 물으면 그날처럼 또 흐릴 셈인지, 아니면 이번에는 소리로 만들어 낼 셈인지, 그 답을 나는 아직 갖고 있지 않았다.
버튼을 누르지는 않았다. 다만 엄마의 목소리를 미리 들어 보듯 헤아렸다. 밥은 먹고 댕기냐, 로 시작해서 한참 다른 얘기를 돌다가 끝에 툭 던질 그 말.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예전 같으면 그 말이 아무것도 아니게 들렸을 텐데, 언젠가 그 말을 다시 듣게 되는 날에는 그게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전화기를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입안에서 박하가 거의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얇은 조각이 혀에 잠깐 붙었다가 녹아 없어졌다. 다 녹은 자리에 남은 건 미움도 후회도 아니었다. 서늘하고 얇은 단맛 하나가 혀 밑에 잠시 고였다. 나는 그걸 뱉지 않았다. 지우지도 않았다. 그대로 삼켰다.
세탁소 쪽에서 스팀 소리가 다시 한 번 났다가 잦아들었다. 나는 이름을 아직 모르는 골목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감나무 가지의 그림자가 발밑에 얕게 깔려 있었고, 나는 그 위를 밟으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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