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녹은 자리
17화. 어두운 부엌의 회색 코트
현관에서 발을 굴렀다.
센서등이 내가 신발을 벗기도 전에 꺼진 탓이었다. 다시 한 번, 조금 세게. 불이 들어왔다가 몇 초를 세고는 도로 나갔다. 나는 어둠 속에 신발 한 짝만 벗은 채로 서 있었다. 세 번째로 발을 굴렀을 때에야 그 짧은 불빛 아래로 거실이 드러났다.
상자가 두 개 줄어 있었다. 낮에 나갈 때는 네 개였는데, 지운의 것으로 보이던 두 개가 없어지고 남은 두 개만 여전히 입을 벌린 채 그 자리에 있었다. 누군가 낮 동안 다녀갔다는 뜻이었다. 열쇠를 아직 반납하지 않았으니 지운일 수도 있고, 그가 부른 사람일 수도 있었다. 나는 어느 쪽인지 굳이 헤아리지 않았다.
지운의 방문이 열려 있었다. 들여다볼 이유가 없는데도 들여다봤다. 침대가 있던 자리에 프레임 자국이 네모나게 눌려 있었다. 마루의 색이 그 안쪽만 조금 밝았다. 벽의 못에는 회색 코트가 걸려 있었다. 아침에도 저기 있었던 건지, 낮에 다시 걸어 둔 건지 알 수 없었다. 저건 안 가져갔구나. 그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그 뒤에 무슨 말이 따라붙으려는 걸 알아채고, 나는 방문을 도로 닫았다. 손잡이가 손안에서 미지근했다.
식탁 의자에 앉았다. 코트도 벗지 않았고 불도 켜지 않았다. 냉장고가 웅, 하고 몸을 한 번 떨더니 조용해졌다. 그 소리가 멎자 집이 얼마나 큰지 처음 알았다. 이 집에서 십 년을 살았는데, 냉장고 소리가 어디까지 닿는지 재어 본 적은 없었다.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공간이 식탁까지 밀려 내려왔다.
혀로 잇몸 안쪽을 훑었다. 정류장에서 마지막 단맛이 묽어지던 감각을 붙들어 두고 싶었지만,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뒤였다. 혀 밑도 미지근하기만 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자꾸 혀를 그 자리로 가져갔다. 없는 것을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전화가 울린 건 여덟 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화면에 엄마, 라고 떠 있었다. 나는 목소리를 고르느라 벨이 세 번 울리도록 두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이에 숨을 한 번 크게 쉬었다. 그러고도 받는 순간 목이 조금 걸렸다.
“밥은 먹고 댕기냐.”
먹었다고 했다. 국수 먹었다고. 거짓말인지 아닌지 나도 모를 말이었다. 낮에 지운이 던졌던 점심 이야기가 왜 그때 입에서 국수로 나왔는지, 나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엄마는 김장 이야기를 시작했다. 배추 값이 작년보다 얼마나 올랐는지, 올해는 몇 포기나 할지, 옆집 할머니가 마당에서 미끄러져 허리를 다쳐 병원에 다닌다는 이야기. 용건이 있어서 건 전화가 아니었다. 엄마의 전화는 늘 그런 식이었다. 나는 응, 응, 하면서 냉장고 문에 붙은 자석을 세었다. 언제 붙였는지 기억도 안 나는 관광지 자석들이었다. 강릉, 통영, 어디였는지 이름이 지워진 것 하나. 손가락 끝으로 하나씩 눌러 가며 세었다.
“지운이는 요새 야근이 많냐.”
자석을 세던 손이 멈췄다. 냉장고 문에 붙은 것 중 하나는 지운이 출장에서 사 온 것이었다. 나는 그 자석 위에 손끝을 올려 두고 응, 하고만 했다. 요새 좀, 이라고 뒤를 흐렸다. 엄마는 그 흐린 뒤를 알아채지 못하고, 남자는 원래 마흔 넘어가면 회사에서 더 부려 먹는다는 이야기로 넘어갔다.
한참을 그렇게 돌려 말하던 엄마가 문득 멈췄다. 내 응, 응, 이 평소보다 짧다는 걸, 사이가 자꾸 빈다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수화기 저편이 잠깐 조용해졌다. 무언가 물으려다 마는 기척이 있었다. 엄마도 나를 닮았거나, 내가 엄마를 닮았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그 짧은 말이 수화기를 타고 오는 순간, 나는 손등으로 입을 막았다. 그런데도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낮에 정류장에서 어딘가에 가느다란 금이 갔고, 십 년 동안 그 안에 눌러 담아 두었던 것이 이제야 그 금을 따라 벌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숨 새는 소리였다가, 그다음에는 어쩔 수 없는 소리가 됐다. 손등으로는 도저히 막아지지 않았다.
엄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왜 우느냐고도, 무슨 일이냐고도. 실컷 울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그냥 수화기를 든 채로 가만히 있었다. 저편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낮게 깔려 왔다. 엄마가 그 소리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이, 나를 혼자 두지 않겠다는 말 같았다.
나는 어두운 부엌에서, 지운의 못에 걸린 코트를 등지고 앉아 있었다. 코트가 걸린 방문은 닫아 두었으니 등 뒤에 있는 건 나무 문짝뿐이었는데도, 나는 그 문 너머 회색 천을 등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아침에 태운 토스트 냄새도, 낮의 인주 냄새도 이제 이 집에 없었다. 냉장고가 다시 웅, 하고 돌기 시작했다. 그 소리 위로 내 울음이 얹혔다. 소리 내어 우는 건 십 년 만에 처음이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어느 순간 엄마가 낮게 말했다. 그만 자, 밥 잘 챙겨 먹고. 나는 응, 하고 겨우 대답했다. 전화가 끊긴 뒤에도 나는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냉장고 문의 자석들은 어둠 속에서 형체만 남아 있었고, 나는 아까 세다 만 그 자리부터 다시 셀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코트는 벗지 않은 채였다. 그 코트를 언제 벗을지, 저 방문을 다시 언제 열지, 못에 걸린 회색 코트를 누가 가지러 올지, 나는 아무것도 정하지 못한 채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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