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단맛16화 / 전 18화5

4부 정류장

16화. 혀 밑에 걸린 얇은 단맛

서인혜


전광판 맨 윗줄의 숫자가 바뀌었다. 지운의 버스가 먼저였다. 141은 아직 삼거리 신호 어딘가에 걸려 있었고, 지운의 번호만 정류장 세 칸 앞으로 당겨져 있었다. 나는 그 숫자를 읽고 나서야, 우리가 다른 번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새삼 알았다. 같은 방향인 줄로 어렴풋이 여겼는데, 애초에 방향이 달랐다.

지운이 몸을 일으켰다. 무릎을 펴는 데 십일 년 전보다 한 박자가 더 걸렸다. 그때는 만원 버스에서 사람들 틈을 비집고 먼저 일어나 손잡이를 잡아 주던 사람이었다. 지금은 벤치 모서리를 손으로 짚고, 짚은 손에 힘을 실어 천천히 일어섰다.

“먼저 갈게.”

그가 코트 자락을 한번 잡았다가 놓았다. 잡을 이유도 놓을 이유도 없는 손이었다. 오른쪽 주머니 쪽은 아니었다. 양철 통이 든 자리는 건드리지 않고, 반대쪽 자락만 쥐었다 놓았다.

그 손등에 아직 붉은 점이 남아 있었다. 아까 청사 안에서, 내 검지에 묻은 인주가 옮겨 붙었던 자리였다. 나중에 지우겠다던 점이 그대로였다.

“그거 안 지웠네.”

내 목소리는 낮게 나왔다. 혼잣말과 물음의 중간쯤에 걸린 소리였다.

지운이 손등을 잠깐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하나면 덮일 만한 자리였다. 그는 손을 그대로 둔 채 고개를 들었다.

“이건 좀 나중에.”

그러고는 웃었다. 입꼬리만 어정쩡하게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웃음이었다. 나는 그 웃음이 어디서 시작해 어디서 끝나는지 눈으로 따라가다가, 같이 웃어 줄 자리를 또 지나쳤다. 늘 그랬다. 그가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얼굴로 무언가를 건네면, 나는 그게 어느 쪽인지 확인하느라 웃을 때를 놓쳤다. 십 년을 그렇게 놓쳤다.

버스가 지붕 그림자를 밟으며 들어섰다. 문이 열리는 공기압 소리가 짧게 새어 나왔다. 지운이 코트 깃을 한 번 여미고 계단 쪽으로 걸었다. 목도리 없는 목이 깃 밖으로 조금 드러나 있었다.

그가 계단에 한 발을 올린 채 반쯤 돌아섰다. 단어를 고르느라 잠깐 멈추는 것을, 나는 옆에서 십 년을 보아 온 그대로 알아보았다.

“잘 살아, 진짜로.”

진담 같은 톤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게 농담인지 확인하려고 그의 눈을 봤다. 그러나 그는 이미 몸을 돌려 카드 단말기에 카드를 대고 있었다. 삑, 하는 소리가 났다. 확인할 눈이 거기 없었다.

너도. 그 짧은 말이 입안까지 올라왔다. 그 뒤로 목도리 안 했잖아, 감기 걸려, 하는 말이 밀려 나오려 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챙기는 말은 이제 갈 곳이 없었다. 그 말들을 받을 사람이 방금 다른 번호의 버스에 올랐다.

문이 닫혔다. 유압 소리가 한 번 더 나고, 버스가 정류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지운은 창가 자리에 앉았다. 앉으면서 몸이 창 쪽으로 눌렸고, 회색 코트 오른쪽 주머니가 유리와 등받이 사이에 끼여 우그러졌다. 그 안의 양철 통이, 십일 년째 같은 사탕을 채워 온 그 통이, 코트 천 아래에서 모서리 진 윤곽으로 잠깐 도드라졌다. 뻑뻑한 뚜껑을 그는 오늘 정류장에서 처음으로 내 앞에서 열었다. 그리고 다시 저 안에 넣어 두었다. 유리 너머로 그 윤곽이 한 뼘쯤 지나가더니, 버스가 속도를 내면서 창틀 밖으로 밀려났다.

버스가 멀어졌다. 뒤 유리에 붙은 노선 번호가 점점 작아졌다. 나는 벤치에 앉은 채 그것을 끝까지 보았다.

입안에 사탕이 아직 남아 있었다. 서늘함은 거의 사라지고, 얇은 단맛 한 겹만 혀 밑에 걸려 있었다. 십일 년 전, 처음 이 사탕을 물었던 날 나는 이 마지막 한 겹이 없어지는 게 아까워서 내릴 정류장을 세 개나 지나쳤다. 다 녹은 자리를 붙잡으려고 낯선 동네까지 실려 갔다가, 도로 걸어 돌아왔다.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혀로 사탕을 굴려 볼까 하다가, 굴리지 않았다. 삼키지 않으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단맛이 옅어지는 속도에 손대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두었다. 사라지는 것을 사라지게 두는 일이 이렇게 힘이 드는 줄, 나는 몰랐다. 정류장 지붕 아래로 바람이 한 번 돌았고, 그 바람에 사탕의 마지막 단맛이 조금 더 빨리 얇아졌다.

지우겠다던 점을 그는 지우지 않고 갔다. 챙기려던 말을 나는 하지 못하고 남겼다. 지운이 앉았던 벤치 자리가 비어 있었고, 그가 손에 힘을 실어 짚었던 모서리에는 자국 하나 남지 않았다. 그의 손등에 남은 붉은 점이 오늘 안으로 지워질지 어떨지, 나는 이제 알 방법이 없었다.

서교동 삼거리 쪽에서 141번의 앞머리가 움직였다. 신호가 풀린 모양이었다. 십일 년 전 나를 창백한 얼굴로 앉혀 놓고, 그 옆에 낯선 남자를 앉혔던 번호가, 이번에는 한 사람만 태우러 오고 있었다. 버스가 두 차선을 건너 정류장 쪽으로 붙는 동안, 입안의 마지막 단맛이 묽어졌다. 언제 얇아졌는지 모르게 혀 밑이 미지근해져 있었다. 사탕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혀로 그 자리를 훑어 보았지만, 서늘함도 단맛도 없었다.

141번이 문을 열었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섰다. 무릎을 펴는 데, 오늘은 한 박자가 더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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