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단맛15화 / 전 18화8

4부 정류장

15화. 뻑뻑한 뚜껑과 박하의 서늘함

서인혜


벤치에 앉은 지 얼마나 됐는지 몰랐다. 지운이 오른쪽 주머니에서 양철 통을 꺼냈다. 손바닥만 한 통은 모서리 칠이 벗겨져 은색 바탕이 드러나 있었다. 뚜껑이 뻑뻑하게 돌아가며 쇳소리를 냈고, 그가 손을 조금 떨면서 알사탕 한 알을 집어 내 쪽으로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입에 넣었다. 혀 위에서 서늘한 단맛이 퍼졌다가 곧 아릿하게 식어 갔다. 십일 년 전 그가 말없이 내밀던 것과 같은 박하였다.

“십일 년 동안,” 나는 사탕을 어금니와 볼 사이로 밀며 물었다. “왜 나한테는 한 번도 안 줬어.”

지운은 전광판을 보고 있었다. 붉은 글자가 141번 도착까지 4분을 알렸다. 그는 한참 답이 없다가 입을 뗐다.

“무서웠나 봐.” 그가 단어를 하나씩 골랐다. “받고 나서, 네가 뱉을까 봐.”

나는 웃으려다 그만뒀다.

박하가 어금니 뒤로 굴러가 거기서 한 번 더 식었다. 얇아질 대로 얇아진 사탕은 혀에 붙었다 떨어지기를 되풀이하면서 서늘한 기운만 목 안쪽으로 흘려보냈다.

지운은 무릎에서 든 눈을 그대로 나에게 두었다. 반쯤 펴진 손이 무릎 위에 얹혀 있었고, 손등의 붉은 점은 마르면서 가장자리가 조금 짙어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문지르지 않았다. 나도 지우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전광판의 141번이 한 정거장 전으로 바뀌었다. 3분.

“그날 병원에서,” 지운이 입을 뗐다.

나는 숨을 멈췄다. 칠 년 전이었다. 초음파실 앞 복도, 식은 커피를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는 주머니 속만 눌러 대던 그 오후. 그가 무슨 말을 하려다 삼켰는지 나는 여태 묻지 않았고, 그도 끝내 꺼내지 않았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그가 말을 골랐다. 목울대가 한 번 오르내렸다. “말해 주고 싶었는데.”

지붕 아래로 바람이 파고들어 그의 코트 자락을 얕게 들췄다. 그는 이번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가 무서워서, 못 했어.”

나는 그 문장이 그의 주머니 안에서 얼마나 오래 눌려 있었는지 헤아려 봤다. 칠 년. 그동안 그는 그 말을 이 양철 통 옆에 나란히 넣고 다닌 셈이었다. 사탕과 함께, 뚜껑을 눌러서. 지켜야 할 것이 하나도 남지 않은 오늘에야 그는 뚜껑을 열었고, 나는 그것을 오늘에야 들었다.

그가 삼키려던 말을 나는 그 복도에서 이미 알아챘다. 알면서도 그가 그것을 소리로 만들기 전에 먼저 등을 보였다. 커피 잔을 쥐고 선 그를 두고, 나는 신발 코만 내려다보며 대기 의자 끝으로 걸어가 앉았다. 그가 다가와 옆에 앉았을 때는 잡지를 펼쳐 얼굴을 가렸다. 그의 침묵이 나를 찌를 자리를 나 스스로 벽으로 세웠다. 물을 오래 틀어 두던 소리도, 반년 동안 열리지 않던 작은방 문도, 나는 전부 그가 나를 밀어내는 신호로만 읽었다.

죽인 것은 미움이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를 아프게 할까 봐 말을 삼켰고, 삼킨 말들이 밥그릇을 비운 채로 우리를 천천히 굶겼다. 나는 그 식탁에 마주 앉아 있던 공범이었다. 그를 굶기는 데 나도 내 몫을 정확히 보탰다.

지운이 무릎 위에서 손을 조금 움직였다. 붉은 점 위에 엄지를 얹었다가, 문지르지는 않고 도로 뗐다.

“우리,” 그가 말했다. “미워하지는 않았지.”

나는 대답 대신 남은 사탕을 혀로 밀어 삼켰다. 서늘함이 목구멍을 넘어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미워했으면,” 내가 말했다. “차라리 나았을까.”

말끝이 또 어디에도 닿지 못하고 흩어졌다. 지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는 것을 물었다는 걸 나도 알았다. 그는 다만 양철 통을 한 번 더 손안에서 눌러 얕은 소리를 냈다. 손을 놀려야 견디는 사람의 오래된 버릇이었다. 나는 그 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통 뚜껑에 남은 그의 지문 자국만 눈으로 좇았다.

전광판의 숫자가 2분으로 바뀌었다.

입안에는 박하 냄새만 남았다. 사탕은 다 녹았는데도 나는 혀로 잇몸 안쪽을 한 번 훑었다. 아직 삼키지 못한 말이 거기 어디 붙어 있지는 않은지, 통째로 넘겨 버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확인하려는 사람의 손짓이었다. 십 년을 못 한 말을 이 사탕 하나 녹는 동안 다 하려던 건 아니었다. 다만 이 서늘함이 완전히 가시기 전에, 하나라도 더.

“통은,” 나는 물었다. “아직도 그 통이네.”

“뚜껑이 잘 안 열려서 몇 번 바꾸려다 뒀어.” 지운이 통을 손바닥 위에서 뒤집었다. “이게 잘 안 열리니까, 남한테 꺼내 주기가 쉽지가 않더라고.”

나는 그 말을 되받지 않았다. 그가 십일 년을 그 뻑뻑한 뚜껑 뒤에 무엇을 넣어 두었는지, 이제 와 물어봐야 다 늦은 이야기였다.

바람이 다시 지붕 아래를 돌았다. 지운은 목도리 없는 목을 코트 깃 속으로 조금 파묻었고, 손등의 붉은 점은 그대로였다. 그가 나중에 지우겠다고 한 그 점이, 어쩌면 오늘 안으로는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저 멀리, 서교동 삼거리 쪽에서 141번의 앞머리가 신호에 걸린 채 보이기 시작했다. 십일 년 전 나를 창백한 얼굴로 앉혀 놓고, 그 옆에 낯선 남자를 앉혔던 번호였다. 그 버스가 이번에도 우리 둘을 같은 자리에 태울지, 아니면 한 사람만 싣고 갈지 나는 알지 못했다. 다만 입안의 박하가 마저 옅어지는 동안, 나는 그 앞머리가 정류장까지 오는 데 걸릴 시간을 세고 있었다.

이 화의 별점·후기

아직 후기가 없어요. 첫 후기를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