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정류장
14화. 주소를 잃은 말들과 붉은 점
“천천히 가자.”
지운이 말했다. 계단을 다 내려온 참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목도리를 한 번 고쳐 맸다. 청사 유리문을 밀고 나올 때 이미 알았다. 아침보다 바람이 찬데도 몸은 더 따뜻했고, 어깨에 얹혀 있던 무엇이 사라진 자리로 찬 공기가 들어와 앉았다. 그게 이상했다. 다 끝냈는데 왜 지금 몸이 가벼운가.
계단 앞에서 우리는 잠깐 멈췄다. 나는 택시, 하고 입안에서 단어를 굴려 보았다. 큰길 쪽으로 손을 들면 금방 잡힐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단어가 목젖 앞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지운도 아무 말이 없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정류장 쪽이었다. 발이 머리보다 먼저 방향을 알고 있었다.
보도블록 하나가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 있었다. 지운이 반 발 앞서 그 자리를 비켜 디뎠다. 나도 같은 자리를, 같은 폭으로 비켰다. 신호를 주고받은 것도 아니었다. 십일 년 전, 처음 나란히 걷던 밤의 보폭을 다리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두려운 건 슬픔이 아니었다. 이 편안함이었다. 도장을 찍고 나온 두 사람의 발이 이렇게 맞아도 되는가. 나는 이 가벼움을 믿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버스 아직 멀었어.”
내가 그렇게 대꾸했다. 재촉인지 그의 말을 받아 주는 건지, 뱉고 나서도 알 수 없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지운이 코트 오른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십일 년째 그 자리에 있는 양철 통이었다. 뚜껑을 눌러 여는 딸깍 소리가 났다. 나는 그 소리에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러나 그는 통을 꺼내지 않았다. 주머니 안에서 손만 한 번 움직이고 말았다.
그의 손등에 붉은 점이 남아 있었다. 아까 창구에서 정본을 건네다 내 검지에서 옮겨 붙은 인주였다. 지운은 그것을 코트 자락에 문지르지 않고 그냥 두고 있었다.
“그거.”
나는 턱으로 그의 손등을 가리켰다.
“안 지워?”
지운이 자기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한참 뒤에, “이건 나중에.” 하고 말끝을 흐렸다. 웃자는 건지 진심인지 가늠이 안 되는 톤이었다. 나중이라는 말에는 우리 사이에 남은 시간이 없었다. 신호가 바뀌었다. 우리는 다시 같은 폭으로 길을 건넜다. 그가 그 붉은 점을 일부러 남겨 두었다는 걸 알았지만 나는 왜냐고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것만은 십 년 동안 우리가 유일하게 잘해 온 일이었다.
정류장 표지판 아래 낡은 나무 벤치가 있었다. 우리는 한 사람 앉을 만큼의 간격을 두고 앉았다. 그 간격은 집 소파에서, 지하철 손잡이에서, 법정 나무 탁자에서 늘 우리 사이에 있던 폭이었다. 이제 와 좁힐 이유도 없었다.
전광판에 141번이 여섯 정거장 전이라고 떴다. 십일 년 전 그를 처음 태웠던, 서교동 삼거리에서 신호를 세 번 받던 그 버스였다. 나는 지운도 저 숫자를 봤는지 곁눈으로 살폈다. 그는 전광판이 아니라 자기 무릎만 보고 있었다.
무릎 위에 두 손이 얹혀 있었다. 오른손이 왼손 손등을 덮었다가, 다시 미끄러져 내려와 무릎뼈 위에 놓였다. 손가락이 코트 천을 한 번 쥐었다 폈다. 붉은 점이 있는 손등은 위로 향한 채였다. 그는 그것을 감추지도 지우지도 않았다. 왼쪽 발뒤꿈치가 벤치 밑에서 두 번 들렸다 내려왔다. 말을 고르는 사람의 발이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삼키고 있는지 알 것 같으면서도, 아는 척하지 않으려고 전광판만 봤다.
“발 시려?”
지운이 물었다. 내 쪽을 보지 않고, 자기 무릎에 대고 하는 말 같았다.
“안 시려.”
“양말 얇게 신었잖아. 아침에.”
그가 그걸 봤다는 게 이상했다. 오늘 아침, 그 집에서 마지막으로 각자 신발을 신던 현관에서였다. 나는 무릎을 조금 안쪽으로 모았다.
“너나 목도리 하지.”
말해 놓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런 말들은 이제 갈 데가 없었다. 챙겨 주는 말도 챙김을 받는 말도, 오늘부로 주소를 잃었다.
버스가 다섯 정거장 전으로 줄었을 때, 지운이 마침내 주머니에서 양철 통을 꺼냈다. 우그러진 뚜껑을 열고, 통을 조금 기울여 내 쪽으로 내밀었다. 안에 하얀 알사탕들이 서로 어깨를 붙이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사탕을 내미는 손을 나는 오래 잊고 지냈다. 각자의 입에서만 녹던 그 서늘한 단맛이, 지금 손 하나 거리로 다시 와 있었다.
“하나 먹을래.”
물음표도 없는, 낮은 문장이었다. 통을 든 손이 아주 조금 떨렸다. 그는 그 떨림을 들키지 않으려는지 팔꿈치를 옆구리에 붙였다.
나는 통 안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손을 뻗을지 말지, 이 마지막 다정을 받아도 되는지 정하지 못했다. 받으면 무언가 다시 시작될 것 같았고, 받지 않으면 십 년 동안 해 온 일을 한 번 더 하는 것뿐이었다. 결국 한 알을 집었다. 손끝에 닿은 알사탕은 통조림 뚜껑처럼 차가웠다. 입에 넣자 박하가 이 뒤에서 벌어졌다. 달고 서늘한 것이 동시에 왔다.
“왜 여태 안 줬어.”
나는 사탕을 굴리며 혼잣말처럼 물었다. 십일 년 동안 채우기만 하고 한 번도 내밀지 않던 통에 대해서였다. 지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뚜껑을 닫으려다 말고, 통을 무릎 위에 세워 두고 두 손으로 감쌌다. 버스가 두 정거장 더 줄었다. 141번이 세 정거장 전으로 떴을 때, 그가 무릎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무서웠나 봐.”
그러고는 다시 입을 닫았다. 정류장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저 아래 신호등이 바뀌는 소리, 어디선가 셔터 내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나는 사탕을 혀 밑으로 밀어 넣었다. 박하가 잇몸을 타고 콧속까지 올라왔다. 그 서늘한 것이 목구멍을 지날 때, 나는 갑자기 다른 복도의 냄새를 맡았다.
칠 년 전 그 병원 복도였다. 소독약 냄새 위에 누군가 뿌린 방향제가 얇게 덮여 있던, 딱 이만큼 차고 단 냄새. 나는 이동식 침대에 실려 그 복도를 지나갔고, 지운은 침대 옆을 반 발 뒤에서 따라 걸었다. 그때도 우리 사이엔 한 사람 폭의 간격이 있었다. 그는 내 손을 잡지 않았다. 잡아도 되는지 몰라서 못 잡은 손이라는 걸, 나는 오늘에서야 저 무릎 위의 손을 보며 알았다. 회복실에서 나왔을 때 그는 자판기 앞에 서 있었다. 손에 따뜻한 캔을 두 개 들고, 어느 것을 내밀어야 할지 정하지 못한 사람처럼. 결국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도 왜 아무 말이 없느냐고 묻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캔을 각자 들고 병원을 나왔다.
그 뒤로 삼켜 온 말들이 사탕 하나 녹는 사이에 줄줄이 떠올랐다. 그날 밤 네가 화장실에서 물을 오래 틀어 놓고 있던 거 알아. 아기 방으로 쓰려던 작은방 문을 네가 반년 동안 안 연 것도 알아. 미안하다는 말을 네가 못 한 게 아니라 내가 못 듣게 굴었다는 것도. 나는 그 말들을 한 번도 꺼내지 않았고, 지운도 자기 몫의 말들을 이 양철 통 속에 넣고 뚜껑을 눌러 닫아 왔다. 무서웠나 봐. 그 한마디가 십 년 치 뚜껑을 딸깍 연 소리였다.
“나도.”
내가 말했다. 사탕이 반쯤 얇아진 뒤였다.
“나도 무서웠어. 계속.”
지운이 처음으로 무릎에서 눈을 들어 나를 봤다. 손등의 붉은 점이 아직 그대로였다. 그는 그것을 나에게 보이려는 사람처럼 손을 무릎 위에서 조금 앞으로 밀었다.
전광판의 141번이 두 정거장 전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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