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단맛13화 / 전 18화9

3부 숙려의 계절

13화. 붉은 원이 닿은 자리

서인혜


법대 앞 나무 탁자에 인주갑이 놓여 있었다. 뚜껑이 반쯤 밀린 채였고, 안쪽의 붉은색은 십일 년 전 종로에서 보았던 것보다 검게 가라앉아 있었다. 오래 쓴 인주는 이렇게 어두워지는구나. 나는 가방 안쪽에서 회양목 도장을 찾았다. 손끝에 잡힌 나무는 아침 머리맡에서 만졌을 때보다 한 겹 더 서늘했다. 인면을 위로 돌려 세우자, 나무 결의 얕은 골마다 오래된 인주가 실핏줄처럼 배어 있는 게 보였다. 그날의 붉은색이었다.

도장을 인주에 눌렀다. 나무가 젖은 색을 먹는 동안, 옆에서 지운이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고는 한참 내쉬지 않았다. 나는 그의 어깨가 오른쪽으로 조금 올라간 채 멈춰 있는 것을 곁눈으로 보았다.

“평생 좋은 데만 찍자.”

그가 언젠가 흰 종이를 네 번 접으며 했던 말이, 서류의 날인란 위로 겹쳤다. 도장을 든 손이 종이 위에서 잠깐 멈췄다. 이 손이 그 손이었다. 구청 민원실에서 처음 이름을 눌렀던 손, 지운이 인주를 닦아 주던 그 손이 지금 같은 나무를 쥐고 다른 종이를 향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손목 아래 어디쯤에서 걸렸다. 나는 힘을 주었다.

찍었다. 떼고 보니 오른쪽 아래가 살짝 떠서 붉은 원의 한쪽이 흐리게 밀려 있었다. 나는 숨을 멈추고 그 뜬 자국을 내려다보았다. 십 년 전에도 이랬다. 구청 창구에서 첫 번째 도장을 이렇게 번지게 찍었고, 그때 지운은 직원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저 사람 원래 첫 번째는 잘 못해요. 두 번째부터 잘해요.”

나는 도장을 든 채 그 문장을 기다렸다. 지금이 그 자리였다. 흐린 자국을 사이에 두고, 그가 그때처럼 한 번 더 그 말을 해 주기를. 그러면 나는 십 년째 알지 못한 그 말이 농담이었는지 위로였는지, 정말 믿어서 한 말이었는지, 오늘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회색 코트 오른쪽 주머니에서 양철 통이 손에 눌리는 소리가 얕게 났다. 뚜껑과 몸통이 맞물리며 우그러지는 소리였다. 십일 년 전, 종로 인장 가게에서 그가 사탕을 담아 두던 그 통이었다. 그가 목 안쪽으로 마른기침을 한 번 했다. 무슨 말을 앞에 두고 목을 고르는 사람의 기침이었다. 나는 옆 칸으로 넘어가지 않고 기다렸다. 법대 안쪽은 조용했고, 판사석 뒤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그 조용함을 얇게 긁고 있었다. 지운은 한 번 더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나 나온 것은 말이 아니라 다시 내쉬는 숨이었다. 그뿐이었다.

나는 도장을 인주에 다시 묻혀 옆 칸에 눌렀다. 이번에는 힘을 고르게 실었고, 붉은 원이 이가 빠진 데 없이 선명하게 앉았다. 종이 위에 나란히 놓인 두 자국을 나는 잠시 내려다보았다. 시작한 종이에도 이렇게 두 개가 있었다. 그때는 선명한 쪽만 남기고 흐린 쪽은 무효라고 옆에 작게 적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됐네.”

지운이 낮게 말했다. 응, 하고 대답하려 했는데 입안이 말라 소리가 붙지 않았다. 나는 고개만 한 번 움직였다. 그가 자기 도장을 꺼냈다. 검은 손잡이 끝이 손톱에 눌려 하얗게 되도록 쥐고, 인주에 대고 한 번, 종이에 대고 한 번 눌렀다. 그의 원은 처음부터 선명했다. 그는 첫 번째부터 잘하는 사람이었다.

각자 손가락을 닦았다. 나는 검지 옆면에 옮겨 붙은 붉은 자국을 물티슈 없이 엄지로 문질렀다. 문지를수록 살갗 안쪽으로 번지기만 했다. 지운도 자기 손을 자기 코트 자락에 닦았다. 십 년 전 그날, 그는 내 손가락에 묻은 인주를 자기 주머니의 휴지로 닦아 주었다. 손을 잡아 자기 쪽으로 당겨서, 관절 하나하나를 눌러 가며 닦았다. 오늘은 각자의 손을 각자가 닦았고, 그게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규칙 같았다.

결혼을 시작한 도장으로 결혼을 끝냈다. 그 문장이 다 찍히고 나서야, 한 박자 늦게 가슴 아래까지 내려왔다. 서류는 이미 두 개의 붉은 점을 얹고 판사 쪽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직원이 종이를 집어 위아래를 맞추느라 탁자 모서리에 두 번 톡톡 쳤다. 그 소리에 붉은 자국들이 잠깐 흔들려 보였다. 나는 손안에 도장을 쥔 채 인주 냄새를 맡았다. 비린 것도 아니고 단 것도 아닌, 오래된 붉은색의 냄새였다. 그 냄새 속에서, 십 년 동안 아무 데도 새지 않게 봉해 두었던 무언가에 가느다란 금이 가는 것을 나는 혼자 느꼈다. 유리잔 바닥에 실금이 지나갈 때처럼, 소리는 없고 표면만 잠깐 어긋났다.

도장을 가방에 넣었다. 넣기 전에 나는 인면을 한 번 더 위로 세워 보았다. 인주는 마르지 않은 채였고, 나무 결의 골마다 새로 밴 붉은색이 아침의 그것 위에 겹쳐 앉아 있었다. 손수건으로 인면을 감싸려다 그만두고, 그대로 가방 안쪽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지퍼를 끝까지 당기자 나무가 천 안에서 한 번 굴러 벽에 닿는 감촉이 손등으로 전해졌다. 이 도장을 이제 어디에 쓰나. 통장에도, 계약서에도, 이 이름 두 자를 다시 누를 일이 남아 있을까. 나는 그 생각을 접어 가방 안쪽으로 함께 밀어 넣었다.

옆에서 지운이 자기 도장을 코트 안주머니에 넣는 소리가 났다. 양철 통이 든 주머니가 아니라, 반대쪽 주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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