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숙려의 계절
12화. 손끝에 남은 붉은 점
스피커가 지직 소리를 한 번 낸 다음에 이름이 나왔다.
“서인혜, 한지운 님.”
두 이름이 한 호흡에 붙어서 나왔다. 십 년 동안 우리는 늘 따로 불렸다. 병원에서도, 은행에서도, 관공서 창구에서도. 한 사람의 이름이 불리고, 그 사람이 일을 마치면 다른 사람의 이름이 불렸다. 마지막에야 두 이름이 붙어서 한 번에 나왔다. 붙여서 부르는 걸 마지막까지 아껴 둔 사람처럼.
나는 쥐고 있던 번호표를 폈다. 손바닥 안쪽 살에 파란 잉크가 옮겨 붙어 있었다. 아까 손에 땀이 났던 모양이었다. 손금을 따라 번진 그 자국을 나는 잠깐 들여다보았다. 지운이 먼저 일어섰다. 그의 코트 자락이 의자 팔걸이를 스쳤고, 주머니 안에서 양철 통이 한 번 짧게 부딪는 소리를 냈다. 십일 년째 같은 소리였다. 몇 시간 뒤면 내 세계에서 사라질 소리였다. 나는 번호표를 반으로 접어 가방 안주머니에 넣고 무릎을 짚어 일어섰다.
안내판의 화살표를 따라 좁은 복도를 걸었다. 복도의 공기는 대기실보다 서늘했다. 오래된 청사 특유의, 라디에이터를 틀어도 벽 안쪽 어딘가에 남아 있는 냉기였다. 목덜미로 그 서늘함이 지나갔고, 나는 코트 깃을 한 번 여몄다. 앞에는 지운, 뒤에는 나. 반걸음 차이였다. 결혼 전에도, 결혼하고 나서도, 우리는 늘 이 간격으로 걸었다. 그의 어깨가 내 시야의 왼쪽 위에 있었고, 나는 그 어깨의 위치만 보고도 그가 지금 긴장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었다. 오늘 그 어깨는 평소보다 반 뼘쯤 높았다. 복도 끝에서 그의 구두 소리가 잠깐 멈췄다가, 다시 이어졌다.
판사석 앞에는 허리께에 오는 낮은 나무 난간이 있었다. 나는 왼손으로 그 난간을 짚었다. 오래 만져 반들반들해진 나무는 서늘하고 미끈했다. 손끝에 닿는 결이 오늘따라 또렷했다. 우리는 그 앞에 섰다. 어깨를 나란히, 그러나 팔이 닿지 않을 만큼 벌려서. 누가 재 놓은 것도 아닌데 그 거리는 정확했다.
판사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두 분, 이혼에 합의하신 것 맞습니까.”
목소리에 온도가 없었다. 하루에 몇 번씩 같은 문장을 발음하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나는 대답했다.
“네.”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또렷하게 나와서 스스로 조금 놀랐다. 방 안 어딘가에 부딪혀 되돌아온 그 한 글자가 낯설었다. 판사가 시선을 다음 칸으로 옮기며 지운에게 같은 것을 물었다.
“네.”
그가 대답했다. 짧고 정확한 대답이었다. 그런데 그 한 글자의 끝이 미세하게 아래로 꺾였다. 무언가를 삼키다 만 것 같은 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다만 곁눈으로, 그의 오른손이 코트 주머니 쪽으로 반쯤 올라갔다가 도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손끝이 주머니 입구까지 갔다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되돌아왔다. 양철 통을 만지려다 만 손이었다. 유산하던 밤 병원 복도에서, 그 통을 꺼내려다 끝내 꺼내지 못했던 손과 같은 높이, 같은 각도였다. 나는 그 손을 십 년 만에 다시 알아보았다.
판사가 서류 두 장을 각각 우리 앞으로 밀었다.
“여기, 각자 확인하시고 서명 또는 날인하십시오.”
나는 가방을 열고 회양목 도장을 꺼냈다. 손바닥 안에서 도장은 아침보다 더 서늘했다. 나무는 원래 이렇게 차가운 것이 아닌데, 하루 종일 가방 안에서 무엇을 빨아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차가웠다. 지운의 시선이 그 도장으로 내려왔다. 그가 그것을 알아보고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거……”
그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뒤를 삼켰다. 나는 이번에도 묻지 않았다. 그가 삼킨 말이 무엇인지 나는 십 년 동안 한 번도 묻지 않았고, 오늘도 묻지 않을 것이었다. 묻지 않는 대신 나는 도장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회양목 손잡이가 손바닥에 배긴 결을 따라 조금씩 미끄러웠다. 검지 안쪽이 저 혼자 떨리는 것을 나는 엄지로 눌러 멈췄다.
나는 인주 갑을 열었다. 붉은 것이 얕게 고여 있었다. 도장을 눌렀다 뗐다. 첫 번째 자리가 흐리게 번졌다. 가운데가 비고 테두리만 붉게 남았다. 십 년 전 마포구청에서와 똑같았다. 나는 생각할 새도 없이 옆 칸으로 손을 옮겨 다시 눌렀다. 두 번째는 선명했다. 서, 인, 혜. 세 글자가 붉게 박혔다.
지운이 아주 작게 숨을 내쉬는 소리를 냈다. 거의 들리지 않는 소리였다. 나는 그 소리 뒤에 무언가가 따라 나오길 기다리며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저 사람 원래 첫 번째는 잘 못해요, 두 번째부터 잘해요. 십 년 전 구청 직원 앞에서 그가 했던 그 말. 그 말이 나오면 그때처럼 못 들은 척 앞만 보려고 나는 턱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가 도장 위에 자기 도장을 마저 찍는 소리만 났다. 한, 지, 운.
말이 끝내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내가 그 말을 줄곧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판사가 두 장의 서류를 나란히 놓고 도장을 확인했다.
“확인서 정본은 밖에서 받으십시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는 벌써 다음 서류철을 당기고 있었다. 나는 손가락 끝을 들여다보았다. 검지 끝에 인주가 묻어 있었다. 붉은 것이 지문 사이 골을 따라 배어 있었다. 닦을 것을 찾아 주머니를 더듬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가방 안에 휴지가 없었다.
십 년 전에는 지운이 휴지를 꺼내 내 손가락을 닦아 주었다. 인주가 다 지워질 때까지, 손등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휴지를 접어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그 순간을 떠올렸고, 옆에 선 지운을 향해 몸을 반쯤 돌리려다 멈췄다. 그는 이미 자기 도장을 케이스에 넣고,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였다. 이번엔 양철 통을 만지려다 만 손이 아니었다. 통을 그냥 쥐고 있는 손이었다. 그는 내 손가락을 보지 않았다.
나는 붉은 것이 묻은 검지를 다른 손가락 안으로 말아 쥐었다. 판사석을 등지고 걷기 시작했다.
법정 문은 안쪽으로 무겁게 열리는 문이었다. 지운이 손잡이를 당겨 문을 열고, 잡은 채로 반걸음 물러섰다. 나더러 먼저 나가라는 자세였다. 십 년 동안 몸에 밴 자세였다. 나는 그 문을 지나며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그도 기다리지 않았다. 문이 등 뒤에서 천천히 닫히는 동안, 그의 구두 소리가 다시 반걸음 뒤로 따라붙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앞뒤가 바뀌어 있었다.
복도 끝에 정본을 받는 창구가 있었다. 유리 칸막이 아래 손바닥만 한 틈이 뚫려 있었고, 그 안쪽에서 직원이 우리 이름을 확인했다.
“서인혜 님, 한지운 님, 두 분 맞으시죠. 정본은 각자 한 부씩 나갑니다.”
직원이 서류 두 부를 유리 아래 틈으로 밀어 넣었다. 두 부가 겹쳐서, 내 쪽에 더 가깝게 나왔다. 나는 손을 뻗다가 잠깐 멈췄다. 지운도 같은 순간에 손을 반쯤 내밀었다가, 내 손이 먼저 닿는 걸 보고 도로 거뒀다. 우리는 창구 앞에서 어색하게 한 박자를 흘려보냈다.
“제가 집을게요.”
내가 말했다. 두 부를 다 집어 든 다음, 위의 한 부를 지운에게 내밀었다. 그가 그것을 받았다. 종이를 건네받는 그의 손끝이 내 검지 끝을 스쳤다. 아직 마르지 않은 인주가 그의 손등에 붉은 점 하나를 옮겨 놓았다. 그는 그것을 보고도 닦지 않았다. 손등을 코트 자락에 슬쩍 문지르기만 했다.
“챙겨.”
그가 말했다. 십 년 동안 나에게 하던 말투 그대로였다. 나는 정본을 반으로 접어 가방에 넣었다. 청사 밖으로 나가는 유리문 너머로 빛이 바닥에 길게 누워 있었다. 지운이 먼저 그쪽으로 걸어갔다. 손등의 붉은 점을 그대로 둔 채였다. 이번에는 그의 반걸음 뒤를 지키는 사람이 없었고, 나는 주먹 안에 감춘 검지를 그대로 쥐고 그 자리에 잠시 더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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