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숙려의 계절
11화. 문틀 너머의 노란 선
전화는 열한 시가 넘어서 왔다.
액정에 뜬 글자를 보고 나는 벨이 두 번 더 울리도록 두었다. 이 시간의 전화는 늘 아무 용건도 없었다. 아무 용건도 없다는 것이 엄마의 용건이었다.
“밥은 먹고 댕기냐.”
먹었다고 했다. 실은 저녁에 물만 마셨지만, 엄마에게 하는 대답은 오래전부터 사실과 상관없이 정해져 있었다. 엄마는 김장 이야기를 꺼냈다. 올해는 배추가 실하다고, 무는 작년만 못하다고, 젓갈은 어디 것을 써야 맛이 든다고. 그러다 옆집 아주머니가 무릎 수술을 했다는 이야기로 넘어갔고, 다시 요새 보는 드라마 이야기로 미끄러졌다. 나는 이불 위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어둠 속에서 창밖을 봤다. 맞은편 동의 불이 하나둘 꺼지고 있었다. 엄마의 말은 어디로도 향하지 않고 그저 흘렀고, 나는 그 흐름에 이따금 응, 그래, 하고 돌을 하나씩 놓았다.
말이 잠깐 끊겼다.
“지운이는 요새 별일 없지.”
용건은 늘 끝에 왔다. 나는 별일 없다고 했다. 이혼 서류가 이미 접수됐고 확인 기일이 잡혔다는 말은 아직 하지 않았다. 엄마도 어렴풋이 아는 눈치였지만 우리는 서로 그것을 정확한 문장으로 만들지 않았다. 엄마가 잠깐 말이 없다가 말했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그러고는 끊었다. 뭐가 다 그런지는 말하지 않았다. 나도 묻지 않았다. 그 집에서는 늘 그런 식이었다. 나는 그 집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휴대폰 화면이 저 혼자 꺼졌다. 나는 어두운 안방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냉장고 소리도, 시계 소리도, 옆방의 기척도 없었다. 뺨이 서늘해서 손등을 대 보고 나서야 눈물이 턱 아래까지 내려와 있는 걸 알았다. 언제부터 울고 있었는지 나는 몰랐다. 우는 줄도 모르고 우는 것은 이 집에서 익힌 여러 기술 중 하나였다.
물방울이 이불 위로 떨어졌다. 회색 극세사 위에 검은 자국이 번졌다. 가장자리가 둥글게 젖어 들어가는 모양을, 나는 오래 봤다. 십 년 전 마포구청 민원실에서 흐리게 눌렸던 첫 번째 도장 자국이 저랬다. 힘 조절을 잘못해 인주가 번진 자리. 그 옆에 다시 선명하게 찍었던 두 번째.
그날 민원실은 형광등이 너무 밝았다. 첫 도장을 찍자마자 인주가 번진 걸 보고 나는 손이 굳었다. 다시 받아야 하나, 이거 무효 되는 거 아닌가, 접수대 안쪽 직원의 얼굴만 살폈다. 그때 옆에 서 있던 지운이 몸을 살짝 기울여 직원에게 말했다.
“저 사람 원래 첫 번째는 잘 못해요. 두 번째부터 잘해요.”
직원이 피식 웃었고, 여기 옆 칸에 다시 한 번 찍으시면 돼요, 하고 새 자리를 짚어 주었다. 나는 두 번째 도장을 이번에는 힘을 실어 또렷하게 눌렀다. 지운은 그걸 보고 거봐, 하는 얼굴로 나를 봤다. 그 말이 농담이었는지, 나를 안심시키려던 건지, 아니면 정말 그렇게 믿었던 건지 나는 여태 모른다. 며칠 전 이혼 서류의 첫 칸에 도장을 찍던 날에도 나는 한 번에 찍지 못했다. 그런데 그 옆에는 두 번째부터는 잘한다고 말해 줄 사람이 없었다. 나는 그 말을 더 꺼내려다 그만두었다. 꺼내면 오늘 밤이 더 길어질 것 같았다.
일어섰다. 왜 일어섰는지 나 자신도 정하지 못한 채 안방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 구석에 상자 네 개가 입을 벌린 채 서 있었다. 그 너머, 지운의 방문 아래로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열한 시 반이 넘었는데 그는 자지 않고 있었다. 문틈의 그 좁고 긴 빛 위로 그림자가 한 번 지나갔다. 그러고는 멈췄다. 책상 앞에 앉았거나, 서 있거나, 무언가를 쥐고 있거나. 나는 그림자의 자세를 읽어 보려 했지만 문틈은 그가 무엇을 하는지까지는 보여주지 않았다.
맨발로 그 앞까지 갔다. 마루가 발바닥에 차가웠다. 손을 들어 올렸다. 두드리면, 하고 생각했다.
두드리면 그가 문을 열 것이었다. 그다음이 문제였다. 나는 그다음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는 문을 열고, 잠옷 차림의 나를 보고, 잠깐 눈을 두었다가, 단어를 하나하나 고를 것이었다. 나를 아프게 하지 않을 단어만 골라, 고르고 또 골라, 결국 이렇게 물을 것이었다.
“……왜, 무슨 일 있어.”
그러면 나는 물어야 했다. 십 년 동안 묻지 않은 것을. 그날 밤 병원 복도에서 당신이 삼킨 말이 무엇이었는지. “인혜야, 나는……” 다음에 무슨 말이 오려고 했는지. 그것만 물으면 되는 일이었다. 문 하나 두드리고, 열 마디도 안 되는 그것만 물으면.
그러나 그 문이 실제로 열리면 오갈 말은 달랐다. 나는 그 장면을 눈앞에 다 그렸다. 문이 열리고, 그가 나를 보고,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물을 것이었다.
“피곤해?”
“아니, 물 마시려고.”
내 손에 컵 하나 없을 텐데도 나는 그렇게 대답할 것이었다. 그러면 그는 아, 하고 반 발짝 비켜서며 부엌 쪽으로 길을 터 줄 것이고, 나는 하는 수 없이 싱크대로 가서 마시지도 않을 물을 한 컵 받아 들 것이었다. 그가 방문에 몸을 반쯤 기댄 채 물을 것이다.
“내일 몇 시에 나가?”
“아홉 시쯤.”
“차 막히겠다. 좀 일찍 나가는 게 나을걸.”
“그럴게.”
그러고 나면 더 할 말이 없어서, 나는 컵을 든 채로 잠깐 서 있을 것이었다. 그도 문틀에 기댄 채 잠깐 서 있을 것이었다. 물이 미지근해지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어깨 너머 어딘가를 보다가, 그럼 자, 잘 자, 하고 각자의 문을 닫을 것이었다. 십 년을 산 사람과 나눌 수 있는 말이 그게 다였다. 병원 복도도, 삼킨 말도, “인혜야, 나는” 다음의 그것도 그 대화 어디에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그러니 물어도 소용없었다. 물으면, 그는 또 삼킬 것이었다. 나는 그걸 알았다. 그는 그날의 말을 십 년이나 안전한 곳에 넣어 두고 살아온 사람이었고, 나는 그것을 꺼내라고 다그친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었다. 지금 문을 열어도 우리는 아프지 않은 자리만 골라 딛다가, 아무것도 밟지 못하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물어 놓고도 나는 또 아니야, 아무것도, 하고 돌아설 것이었다. 그 광경이 내 눈앞에서 이미 다 지나가 버렸다.
방문 너머에서 얕은 금속 소리가 났다. 뚜껑이 열렸다가 닫히는, 익숙한 소리. 우그러진 양철 통. 십일 년 동안 사탕을 채우기만 하고 내게는 더 이상 내밀지 않은 그것. 그가 지금 그 통을 열어 사탕 하나를 입에 넣었는지, 아니면 그냥 손으로 만지작거리다 도로 닫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소리가 나를 안으로 끌어들이는 대신 한 발 뒤로 물러서게 했다. 저 방 안에서도 그는 나처럼 무언가를 열었다 닫고 있었다. 우리는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각자 무언가를 여닫으면서, 서로에게는 끝내 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들었던 손을 내렸다. 손바닥을 잠옷 바지에 문질렀다. 문지를수록 손끝에 박하 냄새 같은 것이 배어드는 것 같았다. 상자를 정리하던 밤에 그의 코트 주머니에서 옮겨 붙은 냄새가 아직 손에 남아 있을 리 없는데도 그랬다. 나는 냄새를 지우려고 더 세게 문질렀고, 냄새는 지워지는 대신 손목까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안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 등을 문에 기대고 섰다. 거실의 불빛도, 상자도, 방문 아래 그 노란 선도 이제 보이지 않았다. 이불 위의 물자국은 벌써 반쯤 마르는 중이었다. 검은 테두리만 남고 가운데가 옅어져서, 저러다 아침이면 흔적도 없을 것이었다.
두드리지 않은 것이 다행인지 후회인지 나는 정하지 못했다. 며칠 뒤면 저 문도, 이 문도, 우리 사이의 모든 문이 필요 없어질 것이었다. 그때가 되면 다행과 후회 중 하나가 저절로 정해질까. 나는 어둠 속에서 손끝을 코에 대 보았다. 박하 냄새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것이 처음부터 없던 냄새였는지, 아니면 방금 다 녹아 사라진 것인지, 그것 역시 나는 정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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