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숙려의 계절
10화. 봉하지 않은 상자와 낡은 주머니
숙려기간은 상자로 시작됐다. 처음엔 하나였다. 지운이 마트에서 얻어 온 종이 상자를 거실 구석에 세워 두고 계절 지난 옷부터 접어 넣었다. 며칠 사이 상자는 네 개로 늘었다. 나는 그것들이 입을 벌린 채 그 자리에 며칠씩 있는 걸 보면서도 테이프로 봉하지 않았다. 봉하면 끝나는 것 같아서였는데, 봉하지 않아도 끝나는 건 마찬가지라는 걸 그때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날 밤 지운은 안방 옷장을 비웠다. 옷걸이에서 셔츠를 하나씩 벗겨 소파 쪽 상자로 옮겼고, 나는 현관에 남은 것들을 맡았다. 우산 두 개, 안 신는 구두, 그리고 벽에 걸린 회색 코트. 그 코트는 지운이 사무실을 이쪽으로 옮기던 무렵부터 입던 것이었다. 소매 끝이 닳아 실이 일어난 자리를 나는 눈으로만 알고 있었다.
코트를 접다가 오른쪽 주머니가 묵직해서 손을 넣었다. 양철 통이 잡혔다. 손끝이 먼저 알았다. 뚜껑 모서리의 우그러진 자리, 페인트가 벗겨져 상표 글자가 반쯤 사라진 그 통. 손금으로 짚어도 같은 통이었다. 나는 그것을 든 채로 잠깐 서 있었다.
뚜껑을 밀어 열었다. 사탕 두 알이 서로 붙어 통 안을 굴렀다. 서늘한 냄새가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코보다 손이 먼저 그 냄새를 기억했다. 십일 년 전 141번 버스에서 내 속을 가라앉히던 냄새였다.
“이거.”
지운이 셔츠를 내려놓고 나를 봤다.
“이거 계속 같은 거였어?”
그는 대답을 입 안에서 한참 굴렸다.
“통은 같고. 사탕은 다 떨어지면 채웠어. 십일 년 동안.”
낮은 목소리였다. 그 말투로 그는 예전에 나를 웃기곤 했다. 진담을 농담처럼 말해서 내가 웃을 자리를 놓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이번엔 웃을 자리가 아예 없었다.
나는 통을 든 채로 다른 밤 하나를 떠올렸다. 병원 복도의 형광등, 자판기 커피 냄새, 그가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다 끝내 아무것도 꺼내지 않던 손. 그날 그가 만지고만 있던 게 이 통이었구나. 십일 년을 채워 온 이 통을, 정작 내가 가장 그것을 필요로 했을 밤에는 주머니 안에 그대로 두었구나. 목 안쪽에서 무언가 밀려 올라왔다. 나는 뚜껑을 도로 밀어 닫았다.
닫히는 소리가 생각보다 컸다. 두 사람 다 그 소리를 들었다. 지운이 손을 반쯤 들었다. 통을 받으려는 건지 내 손을 잡으려는 건지 알 수 없는 어중간한 높이에서 손이 멈췄다.
“인혜야, 그거는.”
또 문장의 앞자락만 나왔다. 나는 알고 있었다. 지금 됐어, 하고 한마디만 얹으면 그의 말은 병원 복도에서처럼, 접시가 깨지던 밤처럼 완성되지 못한 채 접힐 것이다. 그렇게 접는 데 나는 능숙했다.
이번엔 됐어, 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코트를 지운의 상자 위가 아니라 원래 있던 못에 다시 걸었다. 소매 닳은 자리가 벽 쪽으로 가게 돌려서.
“이건 아직 네 거잖아.”
그 말이 반어인지 진심인지 나조차 몰랐다. 지운은 반쯤 들었던 손을 천천히 내려 무릎에 올렸다. 그러고는 상자 테이프를 뜯었다. 길게 한 번, 짧게 한 번. 그 소리가 우리 사이의 자리를 메웠다. 그가 침묵을 못 견딜 때 하는 일이 그거였다. 손을 움직여 소리를 만드는 것.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십 년쯤 걸려 겨우 알아 가는 중이었는데, 알아 갈 시간이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십일 년 동안 통을 채우면서도 그는 내게 한 번도 다시 사탕을 내밀지 않았다. 나는 무릎에 놓인 그 손을 봤다.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채우기만 하고 내밀지 않은 게 나를 아끼는 일이었는지, 아니면 나를 마주하기가 무서워서 주머니 안에만 둔 것인지. 물으면 지운은 대답할 것이다. 대답이 돌아오면, 우리가 아직 무언가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건 지금 봉하려는 상자보다 열기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묻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문 너머에서 테이프 뜯는 소리가 두 번 더 났다. 그다음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지운이 상자 앞에 그대로 앉아 있는지, 코트를 다시 내리는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문 하나가 그 사이에서 두꺼웠다.
침대 끝에 걸터앉아 손바닥을 코에 갖다 댔다. 서늘한 냄새가 손금에 아직 얕게 남아 있었다. 나는 이 냄새를 사랑했었다. 얼마 전 지하철 손잡이 앞에서 뒤늦게 알아챈 그 사실을, 이 밤에 손바닥으로 한 번 더 확인했다. 그리고 확인이 어디로도 흘러가지 못하게, 손을 무릎에 문질러 냄새를 지웠다. 회색 바지에 냄새가 옮겨 갔다가 이내 사라졌다.
머리맡 서랍을 열었다. 도장이 든 봉투가 바닥에 그대로 있었다. 손끝으로 봉투 모서리를 눌러 위치만 확인하고 도로 닫았다. 방금 손바닥에서 발견한 것도 그 봉투 곁 어딘가에, 열지 않을 자리에 넣어 두기로 했다. 지켜야 할 게 남아 있는 동안 나는 정직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제 지킬 게 며칠뿐인데도 손은 여전히 먼저 닫는 쪽을 골랐다.
불을 껐다. 거실의 상자 네 개가 어둠 속에서 입을 벌린 채 밤을 샐 것이었다. 그중 하나에는 지운의 옷이, 다른 하나에는 내 것이 들어갈 것이고, 회색 코트만은 어느 상자에도 들어가지 않은 채 못에 걸려 있을 것이었다. 봉하지 않은 상자들이 언제까지 그렇게 입을 벌리고 있을 수 있는지, 나는 어둠 속에서 그것만 헤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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