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단맛9화 / 전 18화7

2부 10년

9화. 식은 미역국과 오래된 흰 종이

서인혜


냉장고 모터가 유난히 크게 돌았다. 여느 저녁이면 있는 줄도 모르던 소리였는데, 그날은 그 소리가 부엌을 다 채우고도 남아서 식탁까지 밀려왔다. 반찬은 세 가지였다. 콩자반과 무나물, 그리고 지운이 데운 미역국. 데웠다고 했지만 김은 이미 다 빠져 있었다.

나는 젓가락으로 콩자반을 세 알쯤 옮겨 놓다가 그만두었다. 밥그릇에서 국그릇 쪽으로, 아무 이유 없이. 옮겨 놓고 나서야 왜 옮겼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밖으로 옆 동의 불빛이 하나둘 꺼졌다. 오른쪽 위 창, 그 아래 창, 다시 왼쪽 어딘가. 누군가는 하루를 접고 있었다.

지운은 숟가락을 들고 국을 한 번 저었다. 젓기만 하고 뜨지는 않았다. 나는 그가 무언가를 하려고 저 손을 놀리고 있다는 걸 알았고, 그것이 국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도 알았다. 냉장고 모터가 한 번 크게 떨리더니 뚝 멎었다. 부엌이 갑자기 조용해졌고, 그 조용함을 기다렸다는 듯 지운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인혜야.”

그는 다음 말을 찾느라 오래 멈췄다. 나는 그 멈춤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면서도 국그릇만 내려다봤다. 미역 한 가닥이 국물 위에 떠 있었다. 불어서 반쯤 풀린, 검고 얇은 것. 나는 그것이 천천히 국물 표면을 도는 걸 봤다.

“우리 이제 그만하자.”

이상한 일이었다. 그 문장을 들은 순간 내 안에서 올라온 건 슬픔이 아니었다. 오래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내쉴 때 같은, 몸이 먼저 가벼워지는 감각이었다. 나는 그 가벼움이 낯설어서 잠깐 말을 못 했다. 슬픈 척이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계산을 하는 나 자신이 더 낯설었다.

“그러자.”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평평했다. 물건을 사고팔 때 값을 부르고 값을 받는 사람처럼. 십 년 동안 우리는 단 한 번도 같은 것을 같은 때에 원한 적이 없었다. 내가 창문을 열고 싶을 때 그는 추워했고, 그가 국수를 먹고 싶을 때 나는 밥을 먹었다. 그런데 하필 관계를 끝내자는 데서 처음으로 우리 의견이 맞았다. 그게 나는 웃음이 날 만큼 서늘했다. 웃지는 않았다.

지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 그러고는 식은 미역국을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었다. 방금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그냥 저녁을 먹는 사람처럼. 나는 그가 국을 넘기는 걸 봤다. 목젖이 한 번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그 움직임을 오래 바라봤다. 저 사람이 십 년 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저렇게 넘겨 왔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나는 그 생각을 끝까지 밀고 가지 않았다.

“국이 다 식었네.” 그가 말했다.

“응, 식었어.” 나는 대답했다.

그 짧은 말이 그날 우리가 주고받은 가장 정직한 말이었다. 국이 식은 것은 사실이었고, 우리 둘 다 그 사실만은 조금의 방어도 없이 인정할 수 있었다. 그 밖의 것들은 인정할 수 없었다. 누가 먼저 식혔는지, 언제부터 식었는지, 데울 수 있었던 밤이 몇 번이나 있었는지. 그런 건 국그릇 밖의 이야기였고, 우리는 국그릇 안에만 머물기로 오래전에 정한 사람들이었다.

설거지는 내가 했다. 지운이 하겠다는 걸 손짓으로 물렸다. 접시가 깨진 뒤로 개수대 옆 그 자리에는 물기가 잘 고였다. 나는 거기에 그릇을 놓지 않으려고 굳이 반대쪽으로 컵과 대접을 쌓았다. 왼손이 자꾸 오른쪽으로 가려는 걸 손목으로 돌려세우면서. 빈자리에 물이 조금씩 차오르는 걸 곁눈으로 보았다.

등 뒤에서 지운이 코트 주머니를 뒤지는 소리가 났다. 부스럭거리는 얇은 비닐. 돌아보지 않아도 그게 무엇인지 알았다. 십일 년째 그의 주머니에서 나는 소리였으니까. 그가 무언가를 반쯤 꺼냈다가 도로 넣는 기척이 있었다. 잠깐의 정적. 그리고 결국 아무것도 내밀지 않은 채 거실 쪽으로 걸어가는 발소리.

나는 수도를 잠갔다. 젖은 손을 앞치마에 문질러 닦으면서, 이제 삼킬 말도 없어졌으니 우리는 오히려 편해지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삼킬 말이 있어서 불편했던 건데, 그 말들을 다 버리기로 했으니 홀가분해질 거라고. 앞치마의 마른 부분을 찾아 손을 몇 번이나 문질렀다. 손은 좀처럼 마르지 않았다.

거실에서는 텔레비전도 켜지지 않았다. 지운이 소파에 앉아 있는지 누워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물소리가 멎은 부엌은 다시 냉장고 모터에게 자리를 내주었고, 그 소리가 돌기 시작하자 나는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그날 밤 나는 안방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불을 끄고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슬픔이 오기를 기다렸던 것 같다. 이런 밤에는 슬픔이 오는 게 순서니까.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대신 엉뚱한 것이 떠올랐다.

혼인신고를 하던 날, 지운이 무언가를 인주에 찍어 종이 한 장을 만들었다. 시험 삼아 눌러 본 자국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남겨 두고 싶었던 건지 나는 끝내 묻지 않았다. 그는 그 종이를 네 번 접어서 지갑 안쪽에 넣었다. 평생 좋은 데만 찍자, 하면서. 그 말을 할 때 그의 목소리가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종이를 접던 손가락의 각도만은 선명했다.

그 종이가 지금 어디 있을까. 아직도 그 지갑에 있을까, 아니면 지갑을 바꾸면서 어딘가에 버려졌을까. 버렸다면 언제 버렸을까. 나는 그것을 생각했다. 슬픔 대신 그 흰 종이 한 장의 행방을 헤아리다가, 헤아리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소파 위의 담요는 각을 맞춰 개켜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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