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층의 찬송8화 / 전 18화7

2부 수요일의 찬송

8화. 빌린 옷의 치수

김도현


“토요일에 시간 비워둬요.”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성경 구절을 읽을 때와 같은 억양이었다. 나는 편의점 카운터 안쪽에서 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을 골라내던 중이었고, 손끝에 밥알이 묻어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그녀는 신세계 본점 앞에서 두 시에 보자고 했고, 형제님, 하고 부르는 소리 뒤로 통화가 끊겼다.

남성관은 조용했다. 발밑에서 대리석이 매끈하게 광을 냈고, 매장과 매장 사이의 간격이 넓어 소리가 멀리 퍼졌다. 수연 씨는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는 동안 내 팔짱을 끼지 않았다. 반보 앞에서 걸으며 옷걸이 사이를 지날 때마다 직원에게 익숙한 눈짓을 보냈고, 그 눈짓 한 번에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나는 반보 뒤에서 그 광경을 따라갔다. 여기서는 권사님도 수연 씨도 어울리지 않아서, 나는 그녀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랐다.

리넨 셔츠가 걸린 매대 앞에서 그녀가 멈췄다. 손끝으로 옷걸이를 훑더니 아이보리색 한 장을 뽑아 내 가슴에 대보았다. 향수 냄새가 옷깃을 스쳤다.

“이 색이 형제님 얼굴이랑 맞네.”

직원이 탈의실 커튼을 걷어주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 커튼을 쳤다. 좁은 거울 속에 내 얼굴이 있었다. 편의점 유니폼 위에 덧입고 온 티셔츠를 벗자 목덜미에서 밤샘 근무의 냄새가 올라왔다. 삼각김밥 냉장고와 물걸레와 락스가 뒤섞인 냄새. 나는 그 티셔츠를 개어 의자에 올려두고 리넨 셔츠의 소매에 팔을 꿰었다.

가격표가 겨드랑이 쪽 솔기에 매달려 있었다. 팔을 내리자 그 종이 조각이 옆구리에 닿았다. 나는 그것을 손바닥으로 감싸 쥐고 엄지로 숫자가 인쇄된 면을 덮었다. 뒤집으면 보일 자리였지만 뒤집지 않았다. 숫자를 알면 내가 얼마짜리인지도 계산될 것 같았다. 지난주 헌금함에 얹은 한 장짜리 정산이 아직 손바닥 어딘가에서 마르지 않았는데, 여기 걸린 옷 한 벌은 그 정산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야 닿을 값일지 나는 알고 싶지 않았다. 엄지를 뗐다가 다시 덮었다.

단추를 끝까지 채우고 거울 앞에 섰다. 리넨이 어깨선에 정확히 걸렸다. 품이 남지도 당기지도 않았다. 빌린 옷이 몸에 맞는다는 건 무서운 일이었다. 그건 내 몸이 이 매장의 치수 안으로 들어맞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나는 어깨를 한 번 움츠렸다 폈다. 옷은 여전히 맞았다.

커튼이 걷혔다. 수연 씨가 나를 위아래로 훑더니 웃었다.

“이제 우리 교회 청년 같네.”

우리, 라는 말이 목에 걸렸다. 우리 교회의 청년. 정결하고 반듯한, 강 장로가 어깨를 두드리며 은혜가 있다고 말하던 그 청년. 나는 지금 그 청년의 몸에 억지로 맞춰지고 있었고, 이 아이보리색은 그 배역의 의상이었다.

“너무 비싼 거 아니에요.”

말끝이 흐려졌다. 그녀는 대답 대신 카드를 꺼내 직원에게 내밀었다.

“태그 떼고, 입고 나갈게요.”

계산대 위로 흐르던 매장 음악이 어느 순간 익숙한 선율로 넘어갔다. 나는 그게 어느 찬송가의 변주인지, 아니면 내 귀가 제멋대로 그렇게 들은 것인지 끝내 분간하지 못했다. 그녀가 서명하는 동안 직원이 내 낡은 티셔츠를 종이백에 담아 건넸다. 벗어놓은 옷이 새 옷보다 무거웠다. 매장을 나서자마자 나는 화장실을 찾아 들어갔다. 찬물을 틀었다. 세면대에서 쇠 냄새 섞인 물비린내가 올라왔다. 비누를 손바닥에 밀어 거품을 냈다. 손금 사이로, 손톱 밑으로 거품을 밀어넣고 손가락을 하나씩 문질렀다. 손등까지 문지르고 나서 물을 세게 틀어 거품을 씻어냈다. 물이 손목을 타고 소매 끝을 적실 뻔해서 팔을 걷어 올렸다. 거울에는 아이보리색 리넨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저녁 청년부 모임에 갔을 때 재영이 문 앞에서 나를 아래위로 훑었다.

“오, 셔츠 새 거네.”

카디건이라도 걸치고 올 걸 그랬다고 뒤늦게 후회했다.

“그냥 세일하길래.”

재영이 손을 뻗어 리넨 소매 끝을 살짝 잡았다 놓았다. 천을 손끝으로 굴리는 동안 그애의 눈은 소매가 아니라 내 얼굴에 가 있었다.

“세일 같은 소리 하네. 이거 다림질 안 해도 이렇게 떨어지는 건 싼 게 아니야.”

그애는 농담처럼 웃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너 요즘 뭐 있냐.”

나는 그 말을 질문이 아니라 판결로 들었다. 지난 주일, 봉투도 없이 지폐 한 장을 헌금함에 얹던 내 손을 건너편에서 지켜보던 그애의 시선이 겹쳐왔다. 손을 자꾸 씻더라던 목소리도 함께.

“뭐가 있어. 알바비 좀 모은 거지.”

재영은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이 신세계에서 화장실까지 걸어간 거리보다 길었다. 그러고는 짧게 말했다.

“옷이 사람 바꾸더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목을 덮은 리넨 소매가 그제야 낯설게 느껴졌다.

고시원 방으로 돌아와 셔츠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벽에 못 하나를 박아둔 자리였다. 아이보리색이 벽지에 닿았다. 오래된 물자국이 누렇게 번진 벽지였고, 그 얼룩 옆에 새 리넨이 나란히 걸리자 두 색이 서로를 밀어냈다. 나는 방바닥에 앉아 그 꼴을 오래 바라보았다. 종이백 안에는 벗어놓고 온 티셔츠가 그대로 들어 있었다. 밤샘 근무의 냄새가 밴 옷을 나는 아직 꺼내지 않았다.

수요일까지는 이제 나흘이 아니라 사흘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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