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물과 기름
4화. 대사를 외운 무대
주일 오전 열한 시가 되기까지, 나는 예배당 세 번째 줄에서 봉투의 무게를 무릎으로 견디고 있었다. 가방에 넣어 온 성경책은 평소보다 두꺼워진 것 같았다. 뜯지 않은 봉투가 로마서 8장 언저리, 그녀의 명함이 끼워진 페이지를 안쪽에서 밀어내고 있었다. 사흘째 그 두께를 손대지 못했다. 오늘도 성경을 펴지 않았다.
강단 옆에서 순서지가 넘어가고, 사회자가 대표 기도 순서를 알렸다. 한수연 권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보리색 정장이었다. 통로를 걸어 마이크 앞으로 나가는 동안, 회중석의 시선이 그녀의 걸음을 따라 조용히 움직였다.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주님, 여기 모인 죄인들을 정결케 하시고.”
목소리에 떨림이 없었다. 성경책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희 가정에 부어주신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소서.”
사흘 전 새벽, 그 입술은 다른 소리를 냈다. 스피커에서 찬송가 볼륨이 올라가고, 그녀가 내 위에서 흐트러지는 동안, 나는 천장의 낯선 조명을 올려다보며 이 소리를 아무도 못 듣는다는 것에 안도했었다. 지금 그 입술이 회중 전체의 정결을 대신 구하고 있었다. 아멘,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낮게 번졌다. 나도 입술을 움직였는지 아닌지 모르겠다.
소름이 돋은 건 그녀가 거짓말을 해서가 아니었다. 거짓말이 저렇게까지 매끄러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넓은 예배당 어디에서도 아무도 그 매끄러움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 무릎 위 성경책으로 눈을 내렸다. 그 안에서 봉투가 나 대신 죄를 알고 있었다.
예배가 끝나고 회중이 로비로 밀려 나왔다. 나는 사람들 틈에 섞여 출구 쪽으로 떠밀렸다. 손에 든 주보를 반으로 접었다가 다시 폈다. 접힌 자리에 흰 골이 생기고, 그 골을 손톱으로 눌렀다.
그녀가 남편의 팔짱을 낀 채 내 쪽으로 걸어왔다. 강 장로는 마주치는 교인마다 목례를 받으며 천천히 움직였고, 그녀는 그 팔에 손을 얹은 채 반보쯤 뒤에서 따라왔다. 나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다시 주보를 접었다.
“수요일에 봐요, 형제님.”
스치듯 지나가며 그녀가 말했다. 나른한 서울 말씨였다. 조금 전 마이크 앞에서 정결을 구하던 그 억양 그대로, ‘형제님’이라는 세 글자에 아무 무게도 얹지 않고. 웃는 얼굴이었다.
“네, 권사님.”
말끝이 흐려졌다. 대답하는 순간 그녀의 향수가 코끝을 찔렀다. 그 집 침실에 고여 있던 디퓨저 냄새와 정확히 같은 계열이었다. 로비의 커피 냄새와 사람들 틈에서, 그 냄새 하나가 사흘 전 어둠 속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위장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올라왔다. 나는 입을 다물고 그것을 삼켰다. 주보의 접힌 골이 손안에서 젖어들었다.
강 장로가 뒤따라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손이 무거웠다. 아니, 무겁다기보다 손이 얹힌 자리를 정확히 알게 만드는 종류의 무게였다.
“청년이 은혜가 있어.”
낮고 정중하고 느린 목소리였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우리 집사람이 형제 칭찬을 많이 하더군. 요즘 성경 공부 열심이라고.”
나는 그의 넥타이 매듭 언저리를 봤다.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이 사람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다 알고도 ‘은혜’라는 단어 뒤에 무언가를 심어두는 것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의 어조에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평평함이 있었다.
“계속 나오게. 은혜받는 일이니까.”
그는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손이 떨어져 나가고, 문장 끝에 미소가 남았다. 그가 아내의 손을 이끌고 돌아섰다. 아이보리색 정장과 그의 짙은 재킷이 로비의 유리문 쪽으로 나란히 멀어졌다.
나는 그 뒷모습을 봤다. 세 사람이 각자의 대사를 완벽하게 외운 무대 위에 내가 서 있었다. 대표 기도가 있었고, ‘수요일에 봐요’가 있었고, ‘은혜받는 일’이 있었다. 회중 전체가 관객이었고, 아무도 이것이 연극인 줄 몰랐다. 나는 언제 이 대본을 승낙했던가. 명함을 받던 지하 식당에서였을까, 언덕 위 그 집에서였을까, 아니면 봉투를 성경책 사이에 도로 밀어 넣던 그 밤이었을까. 대사를 외운 적도 없는데 나는 방금 내 차례의 대사를 정확히 쳤다. 네, 권사님. 그게 내 대사였다.
로비를 빠져나오는데, 기둥에 기대선 재영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팔짱을 끼고 나를 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강 장로가 내 어깨를 두드릴 때부터였는지, 그녀가 지나가던 순간부터였는지.
나는 걸음을 늦췄다. 그의 앞을 지나가려면 뭐라도 말을 걸어야 할 것 같았다. 성경 공부가 어쩌고, 권사님이 어쩌고. 입안에서 문장을 골랐다. 하지만 재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농담도, 질문도 없었다. 그는 그냥 나를 봤고, 그 눈이 내 손에 들린 젖은 주보로 한 번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나는 그의 시선을 등지고 유리문을 밀고 나왔다. 재영은 나를 부르지 않았다. 발소리도 뒤따라오지 않았다. 나는 계단 첫 칸에 발을 올렸다가 멈추고, 등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난간을 잡았다. 손아귀에서 젖은 주보가 구겨졌다.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가방 안에서 성경책이 옆구리에 닿았다. 그 안의 봉투는 여전히 뜯기지 않은 채였다. 수요일까지 사흘이 남아 있었다.
이 화의 별점·후기
아직 후기가 없어요. 첫 후기를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