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층의 찬송2화 / 전 18화3

1부 물과 기름

2화. 붉은 와인과 은수저의 언덕

김도현


수연이 쪽지에 적어준 주소는 언덕 꼭대기에 있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이십 분을 걸어 올라가는 동안 담은 점점 높아졌고 대문과 대문 사이가 멀어졌다. 어느 집 안에서 개가 두어 번 짖다 그쳤다. 나는 로마서 8장을 세 번째 되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주소지 앞에 섰을 때 손바닥에 땀이 배어 있었다. 초인종은 놋쇠였고 눌리는 자리만 닳아 반질거렸다. 나는 손가락을 대고도 한참을 누르지 못했다. 셔츠 깃을 여미고, 가방을 열어 성경이 제대로 들어 있는지 확인하고, 로마서는 도망가지 않으니 지금 돌아서도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눌렀다.

“밥은 먹었어요?”

문이 열리자마자 그녀가 물었다. 정죄함이 없나니, 하는 구절이 혀 밑에서 채 마르지 않았는데 그녀는 그런 걸 물었다. 나는 먹었다고도 안 먹었다고도 못 하고 문지방에서 발을 들였다.

집 안은 언덕에서 올려다보던 것보다 조용했다. 신발을 벗는데 대리석 바닥이 발바닥에 서늘하게 닿았다. 현관에서 거실까지 복도가 길었고, 천장이 두 층 높이로 뚫려 있어 위쪽 난간이 어렴풋이 보였다. 벽에 걸린 액자는 그림인지 사진인지 어두워서 분간이 안 됐다. 식탁 위로는 촛대 모양의 조명이 낮게 드리워 노란빛을 뿌리고 있었다. 스피커에서는 찬송가가 낮게 흐르고 있었다. 내가 매주 청년부에서 부르던 곡이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그 소리가 이 집에서 나올 줄 몰라서 나는 잠깐 걸음을 멈췄다.

식탁 위에 성경은 없었다. 대신 와인 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잔 옆에는 라벨이 붉은 와인 병이 서 있었고, 접시는 가장자리에 옅은 금테가 둘린 흰 자기였다. 나는 가방 안에 넣어온 성경의 모서리를 손으로 눌렀다.

“성경은 다음에 해요. 로마서는 도망 안 가니까.”

수연은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고 잔에 와인을 따랐다. 병목이 잔에 닿는 소리, 붉은 것이 흰 잔 벽을 타고 도는 소리가 찬송가 사이로 또렷하게 들렸다. 나는 그녀가 내미는 잔을 받았다. 받지 않을 이유를 찾다가 못 찾은 사람처럼 받았다.

첫 잔을 반쯤 비웠을 때 그녀가 병을 들어 라벨을 내 쪽으로 돌렸다.

“이거 남편이 사둔 건데, 한 병에 얼만지 알면 도현이 못 마셔요.”

나는 라벨의 글씨를 읽지 못했다. 불어 같기도 했다. 성찬식 때 나눠 마시던 포도즙 생각이 났다. 작은 플라스틱 잔에 담긴, 미지근하고 단 그 즙. 같은 붉은 것인데 하나는 값을 숨겼고 하나는 값이 없었다.

“권사님, 저 오늘 로마서 8장 준비해 왔는데요.”

“도현이는 참 성실하다.”

그녀는 성실하다는 말을 칭찬처럼 했다. 나는 그 말에 기분이 좋아지려는 나를 눌렀다.

그녀는 냅킨 위에 은수저 한 벌을 가지런히 놓았다. 스푼과 포크. 손잡이 끝에 무슨 문양이 도드라져 있었다. 나는 왜인지 그 무게가 궁금해서 손가락을 얹었다. 차가웠고, 생각보다 묵직했다.

“그거 영국 거예요.”

수연이 잔 너머로 나를 보며 말했다.

“결혼할 때 받은 거. 근데 도현이 손에 있으니까 더 예쁘네.”

칭찬인지 값을 매기는 소리인지 알 수 없어서 나는 손을 거뒀다. 은수저는 조명 아래 그대로 빛났다. 나는 그 빛에서 눈을 떼려고 와인을 한 모금 삼켰다. 목이 화끈했다.

“권사님, 저는 그냥 로마서를…”

“알아요.”

그녀는 내 말끝을 잘랐다. 자르는 것도 나른하게 했다.

와인이 두 잔째 비워질 무렵, 창밖은 아직 환했다. 6월의 저녁은 길었고, 언덕 아래로 도시가 뿌옇게 밝았다. 그런데 수연이 일어나 커튼을 반쯤 닫았다. 남은 빛이 두꺼운 천을 지나며 붉게 가라앉았다. 명품 식기의 흰 광택 위로 그 붉은 것이 얹혔고, 찬송가는 여전히 흘렀다.

나는 두 가지 마음이 안에서 싸우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하나는 이 집을 지금 나가야 한다고 했다. 언덕을 내려가서 고시원 방 바닥에 떨어진 월세 고지서를 주워야 한다고. 다른 하나는 조금만 더 이 온기 안에 있고 싶다고 했다. 대리석이 서늘한 집, 잔이 부딪히는 집, 나 같은 사람에게 밥을 먹었냐고 물어주는 집.

싸우는 동안 그녀가 내 옆에 와 앉았다. 소파 쿠션이 그녀 쪽으로 기울며 나를 그쪽으로 밀었다. 그녀에게서 향수 냄새가 났다. 와인 냄새와 섞여 달았다. 나는 잔을 내려놓으려다 놓을 자리를 못 찾아 계속 들고 있었다.

“권사님, 저는 세례받은 지 얼마 안 돼서…”

“세례.”

그녀가 그 단어를 따라 했다.

“물로 씻는 거잖아요. 나는 그런 거 좋아.”

그녀가 내 무릎에 손을 얹었다.

“도현이가 얼마나 정결한 사람인지, 나 알아요.”

정결. 그 단어가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나는 내 안의 무언가가 이미 오래전에 무너져 있었다는 걸 알았다. 무너진 걸 이제야 본 것뿐이었다. 그녀는 그 단어를 브랜드 이름처럼, 잔에 따르던 와인 이름처럼 발음했다.

리모컨이 그녀 손에 들려 있었다. 찬송가 볼륨이 한 단계 올라갔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볼 때. 소리가 커지자 그녀가 무엇을 가리려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집에는 우리 둘뿐이었는데도 그녀는 무언가를 덮으려 했다.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감으면 이게 꿈이라고 나중에 스스로에게 둘러댈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내 셔츠 첫 단추를 풀었다. 아까 벨을 누르기 전에 여몄던 그 깃이었다. 조명 아래 은수저가 차갑게 빛났고, 나는 넘어가는 동안에도 그 빛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찬송가는 후렴으로 넘어가 있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나는 입술을 달싹여 그 가사를 따라가다 그만뒀다.

새벽 네 시에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 어둠 속에서 아주 높았다. 옆에서 수연이 잠들어 있었다. 숨소리가 고르고 얕았고, 이불 밖으로 나온 어깨가 희미하게 밝았다. 나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그 숨소리의 간격을 셌다. 깨우면 안 될 것 같았고, 깨어난 그녀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침대에서 발부터 조심스럽게 내렸다. 매트리스가 깊어서 몸을 빼는 데 시간이 걸렸다. 바닥에 흩어진 옷을 손으로 더듬어 찾았다. 셔츠 단추를 아래에서부터 잘못 끼웠다가 다시 풀었다. 어둠 속에서 손이 자꾸 어긋났다. 양말 한 짝이 어디 갔는지 찾다가 그냥 주머니에 넣었다.

거실을 가로질러 나가려는데 식탁 위 은수저가 눈에 들어왔다. 커튼 틈으로 든 가로등 불빛에 손잡이 문양만 희게 도드라졌다. 냅킨 위에 저녁에 놓인 그대로였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무슨 마음이었는지 그것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손잡이의 문양이 손바닥에 배겼다. 차가웠고, 저녁에 만졌을 때보다 더 묵직하게 느껴졌다. 영국에서 왔다는 그 무게를 쥐자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이 밤에 내가 무엇을 받았는지, 아니 무엇을 내주었는지, 그 셈이 수저 한 벌로 맞춰질 것 같았다. 나는 이 집에서 아무것도 없이 나가고 싶지 않았다.

문고리를 잡기 직전에 다시 멈췄다. 놋쇠 문고리는 저녁에 눌렀던 초인종과 같은 빛이었다. 주머니 속 수저의 무게가 갑자기 낯설었다. 훔치는 것과 받는 것 사이에서 내가 무엇을 고르는 중인지, 그때는 이름 붙이지 못했다. 나는 수저를 도로 꺼냈다. 냅킨 위에 올려놓고, 저녁에 놓였던 각도까지 맞춰보려다 손을 뗐다. 그런다고 아무것도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언덕은 아직 어두웠다. 가로등 아래를 지날 때마다 내 그림자가 앞으로 길게 늘어졌다가 발밑으로 접혔다. 세례받던 날 목사님 손에서 이마로 떨어지던 물의 감촉이 자꾸 목덜미에 되살아났다. 그때 나는 정죄함이 없다는 말을 믿었다. 물은 차가웠고 나는 그 차가움이 나를 씻는 줄 알았다.

손을 씻고 싶었다. 어디든 수돗물이 있으면 씻을 것 같았는데, 씻어도 마르지 않을 것 같았다. 한남동에서 종로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이었다. 나는 택시를 부를 돈이 없었고, 부를 돈이 생겼다는 것도 알았다. 내려오는 내내, 내가 이 밤에 잃은 것의 이름을 한 번쯤 불러보려 했지만 끝내 부르지 못했다. 고시원 문을 열면 어젯밤 밟지 않으려 조심했던 그 월세 고지서가 아직 바닥에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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