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금이 간 잔
11화. 지워진 골 위로 지나는 손가락
두 주 동안 액정은 조용했다.
수연 씨의 이름은 거기 한 번도 떠오르지 않았고, 나는 그 침묵을 세는 데에 지난 두 달간 수요일을 세던 정확함을 그대로 옮겨 썼다. 첫 주 수요일에는 감기라고 나를 달랬다. 목이 칼칼했으니, 그 여자도 어딘가에서 뜨거운 물에 꿀을 풀고 있을 거라고. 둘째 주 수요일에는 강 장로의 출장이 겹쳤을 뿐이라고 장부를 맞췄다. 도쿄든 밀라노든 어느 도시의 이름 아래에서 그 여자가 남편과 나란히 조식을 받고 있을 거라고. 나는 핑계를 하나 세워두고 그 위에 다음 핑계를 얹었다. 손님이 끊긴 새벽 두 시, 나는 계산대에 팔꿈치를 괴고 휴대폰을 꺼냈다. 마지막으로 온 메시지를 열어 엄지로 화면을 위로 밀었다가, 더 올라갈 것이 없어 다시 내렸다. 액정에 지문이 뿌옇게 번질 때까지 같은 손짓을 반복하면서도, 나는 그 여자가 답하지 않는 이유들 가운데 나를 덜 다치게 하는 것만 골라 손끝에 쥐고 있었다.
셋째 주 수요일, 나는 초대받지 않은 채 언덕을 올랐다.
도어록 앞에서 손가락이 잠깐 멈췄다. 강민석 장로의 결혼기념일 네 자리. 남의 결혼기념일로 남의 집에 들어가는 이 절차가, 두 달 동안 아무렇지 않게 눌러온 그 번호가 처음으로 낯설게 만져졌다. 검지 끝이 첫 숫자 위에서 한 박자 늦게 내려앉았다. 문이 열리는 전자음은 여느 때와 같았다. 다른 것은 그 뒤였다. 찬송가가 없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가 흐르지 않는 집은, 볼륨이 꺼지자 그냥 넓고 차가운 평수였다. 매주 그 곡의 후렴이 채우던 자리를 이제 냉장고 돌아가는 낮은 소리와, 어디선가 물방울이 싱크대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번갈아 채우고 있었다. 나는 신발을 벗다가 멈칫했다. 내 운동화가 놓이던 자리에 남자용 슬리퍼 한 켤레가 코를 바깥으로 돌린 채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동안 이 현관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건이었다.
수연 씨는 부엌 아일랜드에 서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드리퍼 위로 주전자를 기울여, 가느다란 물줄기로 원을 그렸다. 안쪽에서 바깥으로, 다시 안쪽으로. 손목은 조금도 서두르지 않았고 흔들리지도 않았다. 나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왔어?”
그 한마디에 반가움도 미안함도 없어서, 나는 내가 예약 없이 들이닥친 방문 판매원처럼 서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여자는 주전자를 내려놓고 젖은 드리퍼를 걷어 개수대에 툭 올려놓았다. 잔에 커피를 따르는 동안에도 내 쪽으로는 눈을 주지 않았다. 잔 위로 오른 김이 그 여자의 턱 아래에서 흩어졌다. 나는 늘 지나치던 냉장고 앞으로 갔다. 손이 먼저 습관대로 달력을 찾았다.
도쿄도, 밀라노도 없었다. 붉은 펜으로 또박또박 그어져 있던 자국들이 전부 사라지고, 흰 종이 위에 펜 끝이 눌린 희미한 홈만 남아 있었다. 누가 급히 손톱으로 긁어낸 것 같았다. 나는 손가락 끝을 그 자리에 대고 천천히 쓸어내렸다. 종이 표면은 매끈하다가, 지워진 동그라미가 있던 칸에 이르면 미세하게 걸렸다. 잉크는 벗겨졌는데 펜이 눌러 파놓은 골은 종이 안에 그대로 남아, 손끝이 그 자국을 하나하나 타넘었다. 눈으로는 지워졌고 손으로는 아직 거기 있었다. 나는 그 걸리는 감각을 몇 번이고 되짚었다.
나는 그것들이 강 장로의 부재를 그리는 표시인 줄만 알았다. 남편이 없는 주에 붉은 동그라미가 쳐졌고, 나는 그 빈칸의 수혜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손끝이 그 홈을 다시 훑고 있으니 동그라미의 안쪽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펜이 남편의 부재를 그릴 때마다 그 원 안에 예약되어 있던 것은 나였다. 그건 남편의 일정이 아니라 나의 일정이었다. 두 달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그 달력을 작성하는 쪽에 서본 적이 없었다. 편의점 시재를 맞출 때 나는 숫자 8을 위아래 두 동그라미로 또박또박 나눠 쓰던 사람이었으면서, 정작 나 자신은 남의 달력 위에 그려졌다 지워지는 표시 하나였다. 그려질 때에는 몰랐고, 손톱자국만 남은 그 홈을 만지고 나서야 알았다.
“수연 씨.” 목소리가 갈라졌다.
“왜 연락을 안 했어요.”
그 여자는 커피잔을 아일랜드 위에 내려놓았다. 나를 보지 않고 웃었다. 회개하면 된다던 그 가벼운 억양 그대로였다.
“남편이 요즘 집에 있어.”
그 여자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잔 너머로, 그제야 나를 봤다. 나는 그제야 현관의 슬리퍼가 누구 것인지 알았다. 강 장로는 이제 붉은 동그라미로 지워졌다 그려지는 일정이 아니라, 문 앞에 코를 돌려놓은 저 한 켤레였다. 매장 원목 식탁에서 ‘은혜’를 두 번 말하며 나를 장부에 올린 그 남자가, 이번에는 출장 대신 이 집에 상주하는 항목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가 집에 있다는 말은 곧 내 칸이 지워졌다는 말이었다.
“잠잠해지면 연락할게.”
나를 정리하는 말이 아니라 서랍에 미뤄 넣는 말이었다. 끝내는 말이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그 여자는 문을 닫는 대신 반쯤 열어둔 채 열쇠를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더 따지고 싶었다. 왜 하필 손톱으로 긁어 지웠느냐고, 지우기 전에 한 번쯤 나를 세어보긴 했느냐고. 그러나 따질 자격은 예약을 하는 쪽에게 있지, 예약을 당하는 쪽에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나는 그 부엌 한가운데서 이미 알아버렸다. 그 여자는 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 김이 사라지는 것을 나보다 오래 들여다봤다.
나는 인사 없이 돌아섰다. 현관까지 가는 짧은 복도에서, 손끝이 미끈거리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바지에 문질렀다. 아무것도 만지지 않았는데 그 감각이 먼저 왔다. 씻어도 마르지 않던 그 미끈함이, 이번에는 물조차 닿기 전에 손끝에 고여 있었다. 코를 바깥으로 돌린 슬리퍼를 지나며, 그것이 남편의 자리가 다시 이 집에 놓였다는 표시라는 걸 나는 다시 확인했다. 그가 신다 벗어둔 것인지, 그 여자가 그를 맞으려 미리 꺼내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코가 안이 아니라 바깥을 향해 있어서, 나가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것만 분명했다. 등 뒤에서 그 여자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도어록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소리가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그것을 들으면서도 알고 있었다. ‘잠잠해지면’이라는 말이 아직 내 주머니 안에 남아 있었으니까.
언덕을 내려오면서 나는 습관대로 셈을 시작했다. 다음 수요일까지 며칠. 손가락이 저절로 접히다가 갈 곳을 잃었다. ‘잠잠해지면’에는 날짜가 없었다. 붉은 동그라미가 있어야 셀 수 있는데, 그 여자는 동그라미를 손톱으로 긁어내고 대신 기약 없는 한 문장을 손에 쥐여줬다. 나는 그 문장에 매달려, 언제 다시 그어질지 모르는 칸을 미리 세고 있었다. 셀 대상이 사라진 게 아니었다. 셈이 끝나지 못하도록 대상이 흐려진 것뿐이었다. 언덕 아래 큰길에서 신호가 바뀌었고, 나는 파란불을 놓치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접혔던 손가락이 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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