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층의 찬송10화 / 전 18화5

3부 금이 간 잔

10화. 핀의 침묵과 세어지는 날짜

김도현


재영은 만날 일이 있으면 전화를 걸었다. 벨이 두 번 울리기 전에 받으라는 듯이, 용건만 던지고 끊는 게 그 애 방식이었다. 편의점 카운터에서 삼각김밥 유통기한을 찍어내리다가 나는 진동을 느꼈다. 전화가 아니라 지도 한 장이었다. 종로 뒷골목 어딘가, 붉은 핀이 좁은 골목 안쪽에 박혀 있고 그 아래 “여덟 시” 세 글자만 붙어 있었다. 무언가 어긋났다는 건 그 핀의 침묵으로 알 수 있었다. 재영이 말을 아낄 때는 늘 이미 무언가를 알고 난 뒤였다.

호프집은 지하로 반 층 내려가는 계단 끝에 있었다. 문을 밀자 노가리 굽는 냄새와 튀김 기름 냄새가 한 덩어리로 밀려나왔다. 좁은 홀에 테이블 예닐곱이 붙어 있었고 천장의 노란 백열등이 손님들의 정수리에만 빛을 떨어뜨렸다. 재영은 벽 쪽 구석 자리에 먼저 앉아 있었다. 김 빠진 맥주를 손끝으로 천천히 돌리면서.

“왔냐.”

그게 다였다. 나는 맞은편에 앉아 잔을 채웠다. 재영은 안주도 시키지 않았고 나도 묻지 않았다. 우리는 잔을 부딪쳤고, 그 부딪는 소리가 이 좁은 홀에서 유난히 얇게 울렸다. 나는 아이보리색 리넨 소맷단을 접었다 폈다 했다. 접으면 안쪽의 흰 실밥이 드러났고 펴면 다시 매끈해졌다. 백열등 아래서 그 천은 이 집의 어느 물건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재영의 얼굴은 빛의 각도 때문에 반쯤 지워져 있었고, 나는 그 지워진 쪽을 자꾸 보게 됐다.

한동안 그는 말이 없었다. 침묵이 안주였다. 나는 그 침묵이 무서워서 마른 입에 맥주를 흘려넣었다. 미지근했다.

“너 요즘 한 권사님 집에 다닌다는 말이 돌더라.”

재영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수연의 나른한 서울 말씨도, 강 장로의 느린 정중함도 아니었다. 그냥 재영답게 빠르고 곧은 말이었다. 그 곧음이 오히려 나를 겨눴다.

“로마서 성경 공부.”

대답은 놀랍도록 매끄럽게 나왔다.

“권사님이 청년들 몇 붙잡고 하시는 거야. 나도 그중 하나고.”

거짓말이 신앙의 어휘를 빌려 그렇게 술술 흘러나오는 걸 듣는 순간, 소름이 돋은 건 재영이 아니라 나였다. 로마서, 라는 단어를 나는 아주 깨끗하게 발음했다. 봉투가 끼워져 있지 않은 책, 이제는 정말로 아무것도 끼워져 있지 않은 그 책을 펼치듯이. 그 부드러움이 내 혀에 이미 익어 있었다는 것, 그게 무서웠다.

무서운 건 하나 더 있었다. 나는 그 말을 하는 동안에도 속으로 날짜를 세고 있었다. 오늘이 목요일. 수요일까지 엿새. 재영이 여기서 한 번 더 물으면 뭐라고 답할지, 두 번째로 물으면 어디까지 물러설지, 나는 순서를 미리 매겨두고 있었다. 어떤 문장은 언제 꺼내고 어떤 문장은 아껴둘지. 계산은 손톱이 자라듯 나도 모르게 자라 있었고, 나는 그 계산의 정밀함 앞에서 잔을 든 손이 흔들렸다.

재영은 나를 한참 보았다. 눈을 피하고 싶었지만 피하면 지는 것 같아서 나는 그 반쯤 지워진 얼굴을 마주 봤다.

“됐다. 안 물을게.”

그는 잔을 내 쪽으로 조금 밀었다. 밀린 잔이 테이블 홈에 걸려 맥주가 한 방울 흘렀고, 그 얼룩이 나무결을 따라 천천히 번졌다. 나는 그 번짐을 보았다. 재영은 담뱃갑을 꺼내 손안에서 뒤집었다 세웠다 했다. 담배는 여기서 못 피운다는 걸 그 애도 알았다. 그저 손이 심심한 게 아니라, 무슨 말을 담뱃갑 대신 굴리고 있는 것 같았다.

“예전에 너, 성경 공부 하는 날이면 나한테 전화했었잖아.”

재영이 갑을 세워 세우며 말했다.

“뭐 배웠는지 떠들고 싶어서. 밤 열두 시에도 걸었어, 너. 요즘은 안 걸더라.”

나는 소맷단을 다시 접었다. 흰 실밥이 드러났다.

“바빴어.”

“그래.”

그는 더 캐지 않았다. 캐지 않는 게 캐는 것보다 정확했다. 재영이 진지해지면 말이 짧아진다는 걸 나는 이 년째 알고 있었고, 지금 그 애의 말은 자꾸 짧아지고 있었다. 결국 담배는 한 개비도 꺼내지 않고 갑째로 툭 뱉듯 테이블에 놓았다.

“근데 너 얼굴이 상했다. 야, 진짜 상했어.”

나는 웃으려다 실패했다. 입꼬리만 어정쩡하게 올라갔다가 도로 내려왔다. 재영은 그걸 보고도 더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다만 제 맥주를 한 모금 넘기고, 잔 바닥으로 테이블을 한 번 톡 짚었다. 판결 대신 내려놓는 소리 같았다. 그 말 없음이 방금의 질문보다 무거웠다. 나는 화장실 간다고 일어섰다. 일어서는 동안에도 속으로는, 재영이 등 뒤에서 한 번 더 부르면 뭐라고 답할지 문장을 골라두고 있었다. 그 골라두는 버릇이 스스로 역겨워서 걸음이 빨라졌다.

세면대는 좁고 거울에는 물때가 세로로 흘러 있었다. 나는 수도꼭지를 끝까지 돌렸다. 물이 차가웠다. 손바닥을 비볐다.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편의점에서, 신세계 화장실에서, 언덕을 내려오며 바지에 문지르던 그 동작을 나는 언제부턴가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하고 있었다. 손등 위로 물이 흘렀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지만 손바닥 한가운데는 여전히 미끈했다. 세례 받던 날, 목사가 내 이마에 얹었던 물은 금방 말랐었다. 그 물은 마르라고 있는 물이었다. 지금 이 물은 아무리 틀어도 마르지 않는 무언가를 씻어내려 하고 있었고, 씻기는커녕 자리만 넓어졌다.

나는 젖은 손을 든 채 거울을 봤다. 얼굴은 재영 말대로였다. 그리고 그 얼굴 아래, 목을 조이지 않을 만큼만 풀어둔 아이보리색 셔츠 깃이 있었다. 리넨은 물기 한 방울 없이 깨끗했다. 백화점에서 나올 때 그대로, 언덕에서 도망쳐 내려온 그대로. 나는 그 깃을 오래 들여다봤다. 얼굴은 상했는데 옷은 멀쩡하다는 게, 순서가 뒤바뀐 것 같았다.

자리로 돌아왔을 때 재영은 이미 계산을 마치고 일어서 있었다. 나는 지갑을 꺼내려다 멈췄다. 그가 벌써 카드를 넣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부른 자리야.”

재영이 잔돈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말했다.

“너 오늘은 얻어먹어.”

‘오늘은’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걸렸다. 나는 그 말을 붙잡고 싶었지만 그 애는 벌써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는 내 잔에 남은 맥주를 흘깃 보더니 말없이 문을 밀었다. 계단을 올라 골목으로 나오는 동안에도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헤어지기 전, 그가 잠깐 나를 돌아봤다. 이미 다 아는 얼굴이었다. 아는데도 묻지 않기로 한 얼굴. 그 얼굴이 나를 배웅했고, 나는 반대 방향으로 걸으면서 다시 세고 있었다. 목요일 밤. 수요일까지 이제 닷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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