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손자국
9화. 팔지 못한 손톱 밑의 회색
녹음기는 소리가 없었다. 다만 빨간 불이 일정한 간격으로 꺼졌다 켜졌다 하면서, 종로 갤러리 이층 회의실의 정적을 대신 세고 있었다. 나는 그 불빛을 보면서 앞치마를 벗고 온 것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흙물 묻은 앞치마로 앉아 있었다면 기자가 그것부터 물었을 것이고, 나는 오늘도 작업 이야기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자는 노트를 펴기도 전에 물었다.
“언제 아셨어요? 그, 시한부라는 걸.”
준비한 대답이 있었다. 무광 유약을 왜 골랐는지, 뚜껑 어깨를 왜 눕혔는지, 안지름 십육 센티가 왜 그 숫자인지. 나는 도면 사진을 뽑아 클리어파일에 끼워 왔다. 첫 장을 넘기려고 손을 얹는데, 기자가 사진을 보지도 않고 다시 물었다.
“여섯 달이라고 들었는데, 무섭진 않으세요? 그 감정이 작업에 어떻게 나오는지 궁금해서요.”
창밖에서 오후 햇빛이 들어와 녹음기 위에 작은 사각형을 만들었다. 나는 그 사각형이 테이블 결을 따라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걸 봤다.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도면 이야기를 시작하면 이 사람은 예의 바르게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여섯 달로 돌아올 것이다. 그 계산이 서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흘 전 연구실에서 문 교수가 일러 준 문장이 있었다. 그는 유약 자료 위에 손을 얹은 채 낮고 단정하게 말했다.
“그렇게 물으면, 이렇게 답하세요. 저는 죽음을 재료로 씁니다. 흙처럼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받아 적을 겁니다.”
그때 나는 그 문장이 역겹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내가 준비한 도면 이야기가 저 문장 옆에서 얼마나 시시하게 들릴지를 계산하고 있었다.
“저는 죽음을 재료로 씁니다.”
내 입이 그 문장을 뱉었다. 흙처럼요, 라는 뒤 절은 삼켰다. 그것까지 하면 너무 팔린다는 걸 나도 알았다.
기자의 펜이 빨라졌다. “아, 좋다.” 감탄이 작게 새어 나왔다. 나는 팔리는 문장을 골랐다는 걸 알았고, 그게 정확히 팔린다는 사실에 안도했으며, 안도한 나를 곧바로 경멸했다. 세 가지가 거의 동시에 왔다. 그 사이에 클리어파일 첫 장은 끝내 넘어가지 않았다.
기자는 그 뒤로도 두어 개를 더 물었지만, 전부 문장 하나를 여러 각도에서 다시 받아 적으려는 질문이었다. 재료라는 게 어떤 의미냐, 흙과 죽음이 어떻게 닮았느냐. 나는 방금 던진 문장을 조금씩 바꿔 되돌려 주었다. 도면은 가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기자가 녹음기의 빨간 불을 껐다. 불이 꺼지자 그는 갑자기 사람처럼 웃으며 노트를 덮었다.
“실은 저희 이모도 담도암이셨어요. 재작년에.”
“그럼 잘 아시겠네요.”
내 대답이 짧아서 그는 뒷말을 붙일 자리를 잃었다. 위로 비슷한 걸 준비했다가 삼키는 얼굴이었다. 그는 명함을 내밀고, 기사 나오면 연락드리겠다고 하고, 일어섰다. 앞치마를 안 입고 온 게 이번에는 아쉬웠다. 주머니가 없어서 명함을 손에 쥔 채로 그가 계단 내려가는 소리를 다 들었다. 구두 굽이 층계참에서 한 번 멈췄다가 다시 이어졌다.
빈 회의실에 혼자 남았다. 지난주 회색 코트 평론가가 준 명함은 오늘 입고 온 재킷 안주머니에 있었다. 손을 넣으니 두꺼운 종이 모서리가 손톱에 걸렸다. 그것을 만지작거리다가, 방금 내가 판 게 작품인지 병인지 헷갈렸다. 병으로 만든 작품, 이라고 정리하면 깔끔했는데 그 정리가 제일 마음에 안 들었다. 그건 문 교수의 도록에 그대로 실릴 만한 문장이었다.
복도 끝 화장실로 갔다. 세면대 앞에 서자 위장이 먼저 알았다. 나는 칸으로 들어가 변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침부터 굶은 속에서는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았다. 마른 헛구역질이 목을 몇 번 긁고 지나갔을 뿐이다. 타일 바닥이 무릎으로 차갑게 올라왔다. 물을 내리고 나왔다.
거울 속 얼굴은 생각보다 멀쩡했다. 그게 오히려 화가 났다. 여섯 달 남은 사람이라고 소개받고 왔는데, 거울은 그런 사정을 하나도 담아 주지 않았다. 볼이 조금 꺼진 것 말고는 대학 실기실에서 흙 만지다 잠깐 나온 학생 얼굴이었다. 나는 얼굴이 좀 더 아파 보이길 바랐던가. 그 생각을 하다가 손을 씻으려고 물을 틀었다.
손톱 밑에 흙이 껴 있었다. 어제 유골함 몸통 안벽에 손톱을 세워 자국을 눌러 넣을 때 들어간 흙이었다. 물살에 손등의 흙물은 금방 풀렸지만, 손톱 밑 그 회색만은 물이 겉돌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브러시를 찾다가 멈췄다.
오늘 저 회의실에서 나는 겉을 다 내주었다. 여섯 달을, 병명을, 문 교수가 코치한 문장까지. 기자는 그걸 받아 적었고 좋아했다. 그런데 손톱 밑 이 한 줄은, 유골함 안벽에 눌러 넣은 초승달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 도면 사진에도 없고 녹음기에도 안 들어갔다. 나는 손톱 밑 흙을 파내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물만 대충 털고 손을 내렸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엄마였다. 김치 부쳤다, 목요일에 도착한다, 짠지도 한 통 넣었으니 밥 좀 챙기라는 문자였을 것이다. 화면 위쪽에 첫 줄만 떠 있었다. 나는 그걸 열지 않았다. 손톱 밑에 아직 흙이 있는 손으로 엄마의 문자를 여는 게 어쩐지 순서가 틀린 일 같았다.
거울 속에서, 멀쩡한 얼굴이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그 앞에 서서, 방금 판 것들의 목록과 아직 팔지 않은 것 한 줄을 조용히 맞세워 보았다. 저녁이 되어서야 엄마의 문자를 열 것이었다. 그때까지는, 손톱 밑 회색을 그대로 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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