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들어갈 그릇8화 / 전 32화6

2부 손자국

8화. 젖은 명함과 초승달 자국

윤서리


“여기가 그 학생 작업실입니다.”

문이 예고 없이 열리고 그 말이 먼저 들어왔다. 나는 물레 위 어깨선에 얹은 손을 떼지 않은 채 고개만 돌렸다. 문 교수가 앞장서 있었고, 뒤로 회색 코트를 입은 여자와 안경을 목에 건 남자가 흙냄새를 처음 맡는 얼굴로 문지방에서 걸음을 늦췄다. 실기실은 늘 습했다. 그 습기가 낯선 두 사람의 코트 자락에 달라붙는 게 보였다.

교수는 손바닥을 폈다. 도록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 손짓이었다.

“윤서리. 여섯 달 남았습니다. 자기 유골함을 직접 빚고 있어요.”

여섯 달, 이라는 개월 수가 그의 입에서 그렇게 매끄럽게 굴러 나오는 걸 듣고 나는 젖은 손끝을 어깨선 위에 멈췄다. 물레는 아직 돌고 있었다. 반쯤 올라온 몸통의 어깨가 손 밑에서 저 혼자 몇 바퀴를 더 지나갔다. 내 개월 수가 내 것이 아닌 무언가가 되어 두 사람의 시선 위에 얹히는 소리를, 나는 발판에서 발을 떼며 삼켰다.

회색 코트가 먼저 다가왔다. 물레를 들여다보는 눈이 유약 안 바른 흙에 닿았다가 그 안쪽 어둠으로 미끄러졌다.

“어머, 실제로. 안벽까지 손으로 다 하시는 거예요?”

“네. 제 치수라서요.”

젖은 손을 앞치마에 문지르며 나는 짧게 답했다. 그 짧음이 여자에게는 겸손으로, 남자에게는 무슨 결기로 읽히는 게 보였다. 안경을 목에 건 남자가 낮게 소리를 냈다. 감탄이었다. 흙 앞에서 나는 그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손이 좋다, 물레가 곱다. 그런데 지금 그의 감탄은 내 손이 아니라 내 개월 수를 향하고 있었고, 나는 그걸 알면서도 등줄기가 뜨거워지는 걸 막지 못했다. 조명이 켜진 진열대 위의 물건이 받는 온도가 이런 것일까. 뜨겁고, 어딘가 부끄러운 열이었다.

“서사가 강해요, 문 선생님. 이건 그냥 도자기가 아니라.”

평론가가 말끝을 흐렸고 교수가 그 끝을 받아 이었다.

“죽음이 재료로 들어간 그릇이지요. 흔치 않습니다.”

재료. 나는 그 단어를 흙처럼 입안에서 굴려봤다. 재인이 술에 취해 흘렸던 말이 떠올랐다. 저 인간이 남의 이야기를 작품에 갈아 넣는다던, 조교들 사이의 오래된 소문. 화가 나야 할 자리였다. 그런데 화보다 먼저 계산이 섰다. 회색 코트의 명함이 종로 어느 골목까지 가 닿는지, 안경 남자의 지면이 어느 잡지의 몇 페이지인지, 내 이름이 저 두 입에서 앞으로 몇 번 더 불릴 수 있는지. 나는 재료가 되는 굴욕을 세는 대신 그 굴욕의 시장가를 세고 있었다. 스스로가 우스웠지만, 계산을 멈추지도 않았다.

여자가 코트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물레 옆 마른 자리에 올려두었다. 흙물이 튈까 봐 손이 조심스러웠다.

“전시 전에 꼭 다시 뵈어요, 작가님.”

작가님. 나는 그 호칭에 목 안쪽이 잠기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다시 발판을 밟았다. 물레가 돌기 시작했고 몸통의 어깨가 회전 속에서 흔들렸다. 젖은 손을 얹어 중심을 눌렀다. 이번 학기 내내 내 이름은 조교의 출석부에서 두 번쯤 잘못 불렸다. 윤서리가 윤소리가 되고 윤서리가 다시 윤서희가 되는 동안, 나는 정정하지 않았다. 정정할 만큼 그 이름이 내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흙물 묻은 명함 위에 인쇄된 세 글자, 작가님이 지금 내 것이 되겠다고 목을 조르고 있었다.

문 교수는 두 사람을 문 쪽으로 몰았다. 손님을 데려온 시간만큼 정확하게 데리고 나갔다. 나가기 직전 그가 나를 한 번 돌아봤다. 잘했다도 아니고 미안하다도 아닌, 진열대의 조명을 점검하는 눈이었다. 문이 닫혔다. 습기가 다시 고요히 내려앉았다.

혼자 남아 발판에서 발을 떼자 물레가 천천히 멎었다. 뜨겁던 등이 식기 시작했다. 열이 빠져나간 자리로 다른 것이 뒤늦게 밀려들었다. 나는 방금 여섯 달을 팔았다. 아니, 파는 걸 옆에서 구경당했다. 파는 자와 팔리는 물건 사이 어디쯤에 어정쩡하게 서서, 감탄과 명함을 받았다. 그런데도 나는 물레 옆의 명함을 버리지 못했다. 흙물이 번지기 전에 집어 앞치마 주머니에 밀어 넣는 내 손을, 나는 남의 손처럼 지켜봤다.

작업대로 갔다. 서랍 맨 위 칸을 열고 마른 천을 걷었다. 초벌을 기다리는 몸통이 거기 있었다. 손님들이 본 것은 물레 위의 젖은 이것이 아니라 저 겉의 곡선이었을 것이다. 어깨가 눕고 배가 부른 바깥. 나는 손톱을 세워 몸통 안벽 한 곳을 오래 눌렀다. 회색 살에 초승달 모양 자국이 파였다. 저 사람들이 사 가는 건 겉이지 이 안이 아니라고, 이 우묵한 속만은 아직 아무에게도 넘기지 않았다고, 손톱 밑에 말을 눌러 담듯이.

맨 아래 칸을 열었다. 마른 흙물 걸레 밑에 봉투가 그대로 있었다. 부산 주소와 엄마 이름이 적힌, 우표는 붙이지 않은 봉투. 저 안의 진단서가 손님상에 오르는 순간을 상상하다가 나는 서랍을 소리 없이 닫았다.

닫힌 서랍 앞에서 나는 두 가지를 나란히 저울에 얹었다. 문 교수가 왜 하필 오늘 나를 손님상에 올렸는지가 한쪽에, 그 상 위에서 내가 왜 잠깐 우쭐했는지가 다른 쪽에. 저울은 기울지 않았다. 아직은. 앞치마 주머니 속에서 명함의 모서리가 손등에 닿았다. 마르지 않은 흙물이 그 위에 이미 한 점 번지고 있을 것을, 나는 꺼내 확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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