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들어갈 그릇10화 / 전 32화5

2부 손자국

10화. 손톱 밑에 파고든 회색

윤서리


단톡방은 저녁부터 내 이름을 뱉기 시작했다. 누가 기사 링크를 올렸고, 그 아래로 이모티콘과 감탄사가 쌓였다. 대단하다, 멋지다, 응원한다. 그 말들을 하나씩 읽는데 재인의 전화가 왔다.

“나와. 지금.”

거절할 말을 고를 새도 없었다. 재인은 학교 앞 지하 술집 계단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름때가 손끝에 옮겨붙을 것 같은 테이블에 마주 앉자마자 소주가 나왔다. 재인이 제 잔에만 따르고, 내 잔에 부딪치지도 않고 혼자 털어 넣었다. 목울대가 한 번 크게 움직였다.

나는 오이무침을 젓가락으로 뒤적였다. 식초에 절어 물러진 오이가 접시 바닥에서 이리저리 밀렸다. 먹을 생각은 없었고, 손을 놀릴 데가 필요했다.

“기사 봤지.”

재인이 빈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는 죽음을 재료로 씁니다. 그거.”

나는 젓가락을 멈추지 않았다.

“그거 네 말투 아니잖아. 너 그렇게 안 말해. 너는 아픈 얘기 나오면 딴소리부터 하는 애야. 근데 그 문장은 누가 받아쓴 것처럼 반듯하더라.”

받아쓴 게 맞았다. 연구실에서 문 교수가 흙 얘기하듯 천천히 일러준 문장이었고, 나는 녹음기 앞에서 그걸 내 것처럼 발음했다. 재인에게 그렇다고 말하는 대신, 나는 손톱 밑을 내려다봤다. 어제 씻어내지 않은 회색이 아직 거기 있었다. 유골함 안벽을 손톱으로 눌렀을 때 파고든 색. 물만 대충 털어낸 손이라, 그 회색은 접시 위 오이보다 선명했다.

재인이 소주를 한 잔 더 따랐다. 이번엔 마시지 않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테이블 위 조명이 재인의 얼굴 절반만 밝혔다.

“내가 어제 조교 언니한테 들었어. 문 교수가 종로 갤러리들 돈대. 자기 지도 학생 있다고. 여섯 달 남은 애, 자기 유골함 빚는 애. 그 얘기를 명함 돌리듯이 하고 다닌대.”

“그게 왜.”

내 목소리는 낮게 나왔다. 술집 소음 아래로 깔릴 만큼.

“그게 왜라니. 서리야, 계약서 얘기까지 나왔대. 갤러리랑 뭐가 오가는 중이라고. 그 인간이 널 자기 포트폴리오에 끼워서 팔고 있다는 거야. 십 년 동안 제자 하나 안 두던 사람이 왜 하필 너겠어.”

나는 그 말을 흘려듣지 못했다. 흘려듣고 싶었는데, 혀끝에서 다른 게 먼저 움직였다. 계약이면 값이 매겨졌다는 뜻이고, 값이 매겨졌으면 숫자가 있을 것이었다. 그 숫자가 얼마인지 궁금했다. 내 여섯 달에, 내가 빚는 관에, 시장은 얼마를 부르기로 했을까. 궁금해하는 나 자신이 역해서 나는 소주를 삼켰다. 식도가 뜨거워지는 동안 그 계산을 목구멍 아래로 눌러 넣었다.

“재인아.”

잔을 내려놓으며 나는 말했다.

“나 팔리는 거 아니야.”

말해놓고도 그게 부정인지 다짐인지 알 수 없었다. 재인도 그걸 알아챘는지 잠깐 나를 봤다.

“그럼 뭔데.”

되물어놓고 재인은 정곡을 찌른 뒤 늘 그러듯 먼저 웃으려 했다. 입꼬리가 올라가다 말았다. 이번엔 웃지 못하고 눈시울만 붉어졌다. 그 애가 나 때문에 우는 걸 보는 게, 기사 헤드라인을 읽히는 것보다 견디기 어려웠다.

나는 텅 빈 잔 바닥을 들여다봤다. 답을 미뤘다. 뭐냐고 물으면 뭐라고 해야 하는지, 나도 아직 정하지 못했다. 팔리는 자와 파는 자 사이에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

술집을 나오니 밤공기가 식초 냄새를 씻어냈다. 재인이 계단 위에서 내 팔을 붙잡았다. 손아귀에 힘이 실려 있었다.

“네가 그릇이 되지 마.”

취기 없는 목소리였다.

“그릇 만드는 사람이어야지. 담기는 쪽 말고. 알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는 건 쉬웠다. 재인은 그 대답을 믿고 싶은 얼굴로 나를 한 번 더 보고, 반대편 골목으로 사라졌다.

집으로 가는 길은 오르막이었다. 가로등 사이가 멀어서 골목은 밝았다 어두웠다 했다. 나는 재인의 말을 되뇌려 했는데, 자꾸 다른 게 끼어들었다. 물레 위에서 무너지던 흙을 붙잡던 손. 내 손등을 덮던 마른 손바닥의 온도. 그 손이 겹쳐지자 흙이 단숨에 고요해졌던 것. 경멸할 준비를 하고 갔던 남자에게서 그때 무엇이 건너왔는지, 나는 아직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손톱 밑 회색은 그대로였다. 나는 그 손을 주머니에 넣지 않고 밤공기에 그냥 내놓은 채 걸었다. 재인은 담기는 쪽이 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이미 어딘가 파여 있었다. 파인 자리에 무엇이 고일지를 정하는 게 내 일인지, 아니면 벌써 누가 정해 두었는지. 오르막이 끝나는 데까지 그 질문만 발끝으로 밀며 올라갔다.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한 번 울렸다. 이번엔 꺼내 보지 않았다. 엄마의 김치가 목요일에 온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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