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들어갈 그릇6화 / 전 32화7

1부 선고와 흙

6화. 못 덮은 빈 목

윤서리


숫자 옆에 찍힌 별표부터 눈에 들어왔다. 유약 조합표의 배합비 끝에 만년필로 눌러 찍은 작은 별이 몇 개 있었다. 잉크가 번진 정도로 보아 나중에 덧찍은 것도, 처음부터 있던 것도 섞여 있었다. 성공한 배합에 표시한 건지 버린 배합에 표시한 건지, 나는 그 별의 뜻을 알 수 없었다.

“무광 낼 거면 이 세 가지를 봅니다.”

문 교수가 창가 빛 쪽에서 갈색 종이 파일을 내밀었다. 목요일 오후였고, 유약 자료가 필요하다고 문자를 보낸 건 나였다. 반쯤 열린 문으로 들어섰을 때 그는 서류 뭉치를 뒤적이고 있었고, 내가 온 걸 알면서도 한참을 더 뒤적인 뒤에야 파일을 골라냈다.

나는 파일을 받으며 손끝으로 종이의 결을 훑었다. 오래 만진 종이 특유의, 기름기가 밴 보드라움이 있었다. 조합표에는 그의 글씨가 촘촘했다. 장석 몇 퍼센트, 석회 몇 퍼센트, 그 아래 온도. 숫자를 따라가다 나는 다시 별표에서 멈췄다. 궁금한 건 배합보다 그 별이었지만 묻지 않았다. 물으면 그가 답을 흙 얘기로 덮을 걸 알았다.

파일을 가방에 넣으려고 몸을 돌리는데, 시선이 창가 반대편 구석으로 갔다.

거기 그 항아리가 있었다. 처음 이 방에 왔을 때도 봤던 것이다. 그때는 어두워서 그냥 흰 덩어리로만 보였는데, 오후 빛이 비스듬히 들자 표면에 앉은 먼지가 도드라졌다. 회색 살결 같은 먼지였다. 손가락으로 쓸면 밑에서 흰 살이 드러날 것 같은. 하루 이틀 앉은 먼지가 아니었다. 나는 몇 년쯤일지 세다가 그만뒀다. 세는 데 익숙한 내가 셀 엄두가 안 나는 숫자였다.

어깨선이 부드럽게 흘러내리다 입구에서 뚝 끊겨 있었다. 뚜껑이 얹혔어야 할 자리가 그대로 비어서, 목만 길게 남은 형상이었다. 나는 그 곡선이 내 도면의 뚜껑 어깨와 정반대라는 걸 알아챘다. 심사 때 그가 너무 섰다고 한 내 어깨. 저건 반대로 너무 낮게 눕고, 그 낮은 데서 갑자기 잘려 있었다. 서 있는 것과 누운 것 사이에 뚜껑 하나가 없었다.

“저건 언제 구운 겁니까.”

자료를 핑계로 반 발짝 다가가며 물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파일을 뒤적이던 손도 멈췄다. 나는 그 침묵을 답의 유예로 읽고 한 발 더 갔다.

먼지를 조금만 닦으면 유약의 상태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무광인지 아닌지, 몇 도에서 녹은 살인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손을 뻗었지만, 손이 먼저 알고 있었다. 나는 그냥 그 표면이 손바닥에 어떤 온도로 닿을지 궁금했다. 이십 년 먼지 밑의 흰 살이 차가울지, 아니면 볕을 받아 미지근할지.

“만지지 마.”

반말이었다. 처음 듣는 반말이었다. 물레 위에서 내 손을 감싸 흙의 중심을 잡아줄 때도 그는 존댓말이었다. 그 존댓말의 사람이 이렇게 짧게 문장을 자를 수 있다는 게 낯설어서, 나는 손을 공중에 멈춘 채로 그를 돌아봤다.

그의 얼굴은 화가 난 얼굴이 아니었다. 잠긴 방문이 열린 걸 들킨 사람의 얼굴에 가까웠다. 노여움보다 당황이 먼저 왔고, 당황을 감추려고 다시 굳은 얼굴이었다.

나는 손을 거뒀다.

“죄송합니다. 유약이 궁금해서.”

그도 나도 그게 거짓말인 걸 알았다. 유약은 이미 내 가방 안에 갈색 파일로 들어 있었다.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리고, 목소리도 존댓말로 돌아왔다.

“그건 자료가 아닙니다.”

말을 끊었다가, 흙 얘기를 할 때처럼 문장이 다시 길어졌다.

“어떤 그릇은 안을 비워야 완성됩니다. 처음부터 비우려고 빚은 몸이지요. 그런데 저건 비운 게 아니라 뚜껑을 못 얹은 겁니다. 안이 비어 있는 건 같아 보여도, 그 둘은 아주 다른 얘깁니다.”

나는 그 차이를 알 것 같았다. 비우는 건 계획이고, 못 덮는 건 실패다. 계획한 빈 속은 완성이지만, 못 덮은 빈 속은 아직 끝나지 않은 사고다. 그 앞에서 나는 내 유골함이 어느 쪽이 될지 잠깐 계산했다. 내가 그 안에 들어가 눕는 순간까지 뚜껑을 얹을 사람은 내가 아닐 텐데, 그럼 내 것은 계획인가 실패인가. 계산은 답을 내지 못하고 도로 흙 냄새 속으로 가라앉았다.

돌아 나오면서, 나는 항아리 쪽을 향해 놓인 나무 의자를 봤다. 등받이가 없고, 앉는 면만 반들거렸다. 작업실 어디에나 앉는 흙가루가 그 의자에는 앉지 않았다. 누가 오래, 자주, 흙 묻은 손이 아닌 채로 그 앞에 앉았다는 뜻이었다. 앉아서 뚜껑을 얹지도 못하고, 치우지도 못하고, 그냥 봤다는 뜻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물어도 그가 대답하지 않을 걸 알았고, 어쩌면 나도 아직은 답을 원하지 않았다. 문을 닫으며 마지막으로 본 것은 파일이 아니라 그 빈 목이었다. 내 가방 안에는 무광을 내는 세 가지 배합이 들어 있었고, 그중 어느 것에도 뚜껑을 얹는 법은 적혀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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