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빙렬
32화. 불을 거친 획과 굽지 않은 잔완결
“안 구울 거야.”
조교는 문틈에 고개만 들이민 채 잠시 나를 보다가, 가마동 쪽을 한 번 돌아봤다. 오늘 불을 넣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러 온 얼굴이었다. 물레는 이미 멈춰 있었고 판 위에는 작은 잔 하나가 앉아 있었다. 첫눈은 예보보다 사흘 늦게 왔다. 창을 두드리지도 않고, 소리도 없이, 실기실 유리 바깥에서 회색으로 부풀었다 사라졌다.
남은 흙 한 덩이가 있었다. 유골함을 다 빚고 뚜껑까지 물려 보낸 뒤에 남은, 어디에도 쓸 데가 없는 흙이었다. 나는 그것을 물레에 올렸다. 무엇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유골함도 아니고 누구의 뚜껑도 아닌 것을, 치수도 용도도 없는 것을 처음으로 손에 올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손끝은 여전히 떨렸다. 악수의 무게로 잠깐 눌러 두었던 그 떨림은 그날 밤이 지나자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고, 이제 나는 그것을 잡으려 애쓰지 않았다. 흙이 판을 따라 돌 때 떨림이 그대로 흙에 옮겨 갔다. 벽이 한쪽으로 얇아지고 입술이 기울었다. 봄부터 여름까지의 나였다면 손바닥으로 눕혀 무너뜨리고 처음부터 다시 세웠을 것이다. 반건조 뚜껑의 습도를 밤낮으로 맞추며 실금 하나가 번질까 손전등으로 안쪽을 비추던 여름이 아직 이 손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그때 나는 갈라지지 않으려고 그 여름을 다 썼다.
이번에는 두었다. 기운 입술을 세우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안 구우면 갈라져요.”
조교가 실기실로 한 발 들어서며 말했다. “아깝게.”
“갈라지라고 두는 거야.”
나는 웃으며 답했다. 조교는 무슨 말인지 되묻지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물기가 빠지면서 흙은 제 몸을 조금씩 조일 것이고, 불을 통과하지 못한 채로 어느 밤엔가 소리 없이 갈라질 것이다. 나는 그 쪽을 골랐다. 그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실기실에는 흙 냄새와 첫눈의 물비린내만 남았다. 젖은 흙에서 올라오는 서늘한 냄새와, 창밖에서 스며드는 눈의 냄새는 한동안 구분이 되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왔다. 재인이었다.
“부산 김장 시작했대. 니 엄마가 우리 몫도 담근다더라, 미쳤지.”
나는 잠깐 물레 판 위의 잔을 봤다. 답을 쳤다.
“겉절이만 부쳐달라 해.”
전송을 누르고 나서, 김장독이 익을 무렵까지 이 겨울을 다 볼 수 있을지 없을지 하는 계산이 손끝을 스쳤다. 배추가 소금을 먹는 데 하루, 속을 넣어 익는 데 며칠. 그 며칠에 내 남은 날을 겹쳐 세려다가, 세지 않았다. 배추 얘기는 배추 얘기로 두었다. 재인은 곧 하트 하나를 보내왔고, 나는 그것을 열어 보지 않은 채 화면을 껐다.
굽지 않은 잔을 두 손으로 들어 창가에 올렸다. 흙은 아직 눅눅해서 손바닥에 서늘하게 감겼다. 우묵한 속으로 회색 겨울빛이 천천히 고여 들었다.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고, 그 안에서 고인 채로 흔들렸다.
문 교수가 그저께 아내의 백자를 안고 납골당에 다녀왔다는 얘기를 나는 조교에게서 들었을 뿐이었다. 이십 년을 임시함에 두었던 유골을, 이제야 목을 얻은 항아리로 옮겨 담으러 갔다고 했다. 그가 어떤 얼굴로 뚜껑을 덮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물어서 채워질 자리가 아니었다. 다만 그의 백자 뚜껑 안쪽에는 아무 문장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 나를 조용하게 했다. 불을 지나 굳은 내 획 하나는 그의 그릇에는 없고, 그래서 그의 애도와 내 거래는 같은 가마를 나왔어도 끝내 다른 그릇으로 식었다.
손톱 틈에 마지막으로 낀 흙을 나는 밀어내지 않았다. 세면대로 가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잔 속에 고인 빛이 조금씩 옅어지는 것을 오래 보았다. 저녁이 오는 속도만큼 빛도 물러났고, 잔은 비어 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비어 있는 채로 거기 있었다.
나는 벽으로 걸어가 스위치를 내렸다.
어둠 속에서도 잔의 안쪽만은 창밖 눈빛을 받아 희미하게 우묵했다. 빛이 거기 조금 남아 고였다. 나는 그 안을 채우지 않기로 했다. 손을 뻗지 않았고, 흙을 더 올리지도 않았다. 문을 당겨 닫자 눈 냄새가 문틈에서 한 번 밀려 들어왔다가, 다시 바깥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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