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들어갈 그릇31화 / 전 32화4

5부 빙렬

31화. 물속처럼 어둑한 방에서 닫힌 획

윤서리


큐레이터는 열쇠를 건네면서 딱 한 마디만 했다.

“내일 아홉 시에 인부들 옵니다. 그 전에 나오시면 돼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가 승강기 문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조명은 절반만 남아 있었다. 좌대 위쪽 스포트라이트 하나만 켜 두고 나머지는 꺼진 상태여서, 넓은 방이 물속처럼 어둑했다. 종일 사람들이 오갔던 좌대의 목재는 아직 미지근했다. 손등을 대 보니 체온을 나눠 받은 나무가 제 몸의 온기인 척 굴었다.

유리 상자의 자물쇠를 풀었다. 뚜껑을 밀어 젖히자 안에 갇혀 있던 냄새가 손등으로 먼저 올라왔다. 식은 광물과 마른 유약. 낮 동안 밀폐돼 있던 그 냄새는 사람 냄새가 아니었다. 나는 장갑을 끼지 않았다. 챙겨 오지도 않았다. 어차피 내 것이었다. 내 지문 하나쯤 더 얹혀도 값이 오르내릴 일은 없었다.

두 손으로 뚜껑을 들어 올렸다. 어깨선 위로 번진 실금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잘게 반짝였다. 불이 지나가며 스스로 갈라 놓은 자국이었다. 같은 가마에서 나온 문 교수의 백자에도 이 결이 앉아 있다는 걸 나는 알았다. 하나의 불이 두 그릇에 나눠 준 무늬였고, 그건 내가 도록에 넣지 않은 사실 중 하나였다.

뚜껑을 뒤집어 안쪽으로 손끝을 넣었다. 성형하던 날 손톱으로 눌러 둔 홈이 손끝에 걸렸다. 그 옆으로, 아무도 읽지 못하게 눌러 새긴 획들이 있었다. 여기부터는 아무도 못 판다. 나는 그 문장을 눈으로 보지 않았다. 조명 밑으로 뚜껑을 기울여 확인하지 않고, 손끝으로만 획을 따라 읽었다. 불을 지났는데도 획의 깊이는 성형하던 날의 습기만큼 그대로였다. 유약은 그 안으로 흘러들지 않았다. 획이 너무 얕아서 유약이 고이지 못한 게 아니라, 너무 좁아서 아무것도 앉지 못한 것이었다.

이 문장은 도록 어디에도 없었다. 나를 처음 활자로 옮긴 그 잡지의 후속 기사, 죽음은 팔지 않는다는 제목의 그 기사에도 없었다. 부르는 대로 값을 맞추겠다던 컬렉터의 명함에도 이 획은 닿지 못했다. 나는 잠깐 이걸 사진으로 남길까 생각했다. 손끝으로만 읽고 마는 문장이 아까웠다. 그러다 손을 멈췄다. 사진이 되는 순간 이것도 팔릴 수 있는 물건이 된다. 파일 하나가 어딘가로 넘어가고, 캡션이 붙고, 다시 기사가 되는 길을 나는 이미 봤다. 손끝에만 두기로 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자리는 형태가 없어야 했다.

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야, 혼자 여기서 뭐 하냐.”

재인이 편의점 봉지를 흔들며 들어왔다. 비닐 스치는 소리가 텅 빈 방을 한 번 채웠다.

“문 잠긴 줄 알았네. 미쳤냐 진짜, 불도 다 끄고.”

나는 뚜껑을 든 채 돌아보지 않았다. 등 뒤에서 발소리가 멎었다. 재인이 조금 조용해졌다는 걸, 목소리보다 그 정적으로 알았다.

“그거 안에 뭐 있냐.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유리 상자라 못 열어 봤어.”

나는 뚜껑을 항아리 목으로 천천히 내렸다. 안지름 열여섯, 목 높이 삼점오. 문 교수 아내의 백자에 맞춰 잰 그 치수를 내 것에도 그대로 쓴 게 문득 우스웠다. 죽은 여자의 목에 맞춘 자를 내 목에도 댄 셈이었다. 뚜껑이 목에 물리며 마른 소리가 났다. 흙과 흙이 정확히 맞을 때만 나는, 물기 하나 없는 소리였다.

“손톱자국 몇 개.”

나는 그렇게만 말했다.

“네 손톱?”

“응, 내 손톱.”

재인은 봉지에서 미지근한 캔을 두 개 꺼냈다. 하나를 좌대 옆에 툭 놓았다. 편의점 냉장고에 들어가 있던 물건 같지 않게 상온의 온도였다.

“안 보여 주네.”

“안 보여 줘.”

재인은 나를 잠시 보다가 먼저 웃었다. 정곡을 찌른 다음 늘 먼저 웃어 버리는 버릇.

“됐어. 안쪽은 네가 해라. 바깥은 하도 많은 사람이 만졌으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뚜껑이 완전히 목에 앉는 걸 손바닥으로 눌러 확인했다. 이 그릇에서 값을 매기지 않은 자리 하나가 방금 닫혔다. 낮 동안 유리 너머로 수백 개의 시선이 훑고 간 바깥과 달리, 안쪽에는 내 손끝밖에 닿은 것이 없었다. 그 사실이 나를 안심시켰다. 안심한 나를 이번에는 경멸하지 않았다.

유리 상자를 다시 덮었다. 자물쇠를 채우고 열쇠를 주머니에 넣는 동안 재인이 캔을 땄다. 나는 따지 않았다.

“그 방명록, 너 챙겨 나왔다며. 내가 쓴 거 봤지.”

“봤어. 이 나쁜 년아, 그거.”

“그거 진심이야.”

“알아.”

캔을 손에 쥐고 있었다. 알루미늄이 차가웠다. 항암 뒤로 멈추지 않는 손끝의 미세한 떨림이 그 차가운 면 위에서 더 또렷하게 만져졌다. 세지 않기로 한 떨림인데, 오늘만은 이 떨리는 손끝이 방금 그 문장을 읽어 냈다는 게 이상하게 다행스러웠다. 눈이 아니라 손끝으로 읽어야 하는 문장을, 마침 손끝이 떨려서 한 획 한 획 더 오래 만졌다.

“부산 언제 가.”

“몰라. 배추 절이기 전에 가든가.”

“김장 도와주려고?”

“먹으려고.”

재인이 짧게 웃었다. 부산에 내려가면 김장철이 오고, 엄마가 배추를 소금에 눕힐 것이다. 나는 그 배추가 숨이 죽을 때까지 그 집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었다. 그 계산을 오늘은 하지 않았다. 배추 얘기는 배추 얘기로만 두었다.

그래도 안쪽 문장 하나는 이미 불을 지나 굳었으니, 내가 그 집에 없어도 저건 남을 것이다. 아무도 읽지 못하고, 그래서 아무도 팔지 못하는 채로. 유리 상자 안에서 뚜껑을 물고 닫혀 있는 그 획을, 내일 아홉 시에 오는 인부들도 열지 못한다.

나는 캔을 따지 않은 채 재인의 캔에 부딪쳤다. 딴 캔과 안 딴 캔이 부딪치니 소리가 반만 났다.

“안 마셔?”

“이따가.”

재인은 더 묻지 않았다. 나는 무엇도 세지 않는 저녁의 무게를 손에 쥐고 있었다. 손안의 캔은 여전히 차가웠고, 손끝은 여전히 떨렸고, 뚜껑 안쪽의 획은 이미 습기를 잃은 채 어둠 속에 굳어 있었다. 우리는 절반만 켜진 방을 등지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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