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들어갈 그릇30화 / 전 32화7

5부 빙렬

30화. 세지 않기로 한 저녁

윤서리


방명록은 갤러리 직원이 두 손으로 건넸다. 표지가 손가락 끝을 시리게 할 만큼 서늘했다. 종일 사람 손을 탄 좌대 위에 있었는데도, 무슨 냉장고에서 막 꺼낸 물건처럼 온기가 하나도 없었다. 표지 오른쪽 아래에는 누가 흘린 커피가 갈색으로 번져 있었다. 처음엔 동그란 자국이었을 것이 종이 결을 따라 잘게 갈라지며 퍼져서, 빙렬 같은 무늬를 그려 놓았다. 나는 그 무늬 위에 엄지를 얹었다가 뗐다.

“보시고 두고 가셔도 되고, 가져가셔도 돼요.”

직원이 그렇게 말하고 카운터 뒤로 물러났다. 나는 좌대 모서리에 기대선 채 장을 넘겼다. 첫 장부터 낯간지러운 문장들이었다. 요절 천재라는 말, 우리 시대의 애도라는 말,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한 용기라는 말. 볼펜 색만 다르지 다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값을 부르던 컬렉터들의 이름도 몇 보였다. 명함을 받지 않았던 그 중년 남자의 글씨도 어딘가 있을 텐데, 굳이 찾지는 않았다.

뒤에서 세 번째 장 구석에서 손이 멎었다. 볼펜을 어찌나 세게 눌러 썼는지 획이 종이 뒷면까지 파여 있었다. 다른 사람의 미사여구가 종이 위에 얌전히 얹혀 있다면, 이 글씨만 종이 안으로 박혀 있었다.

그릇은 좋더라, 이 나쁜 년아.

재인의 글씨였다. 오프닝 날 두 시간을 기다렸다가 나와 함께 갤러리를 나섰던 그 애가, 언제 다시 혼자 다녀갔는지 나는 몰랐다. 나한테 말도 없이 왔다가, 방명록 구석에 욕 한 줄만 눌러 놓고 돌아갔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문장을 한참 봤다. 웃음이 목 뒤에서 올라오려는 걸 입술 안쪽을 깨물어 눌렀다.

사과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술집에서 그 애가 내 전시를 두고 장례식 상납이라고 했을 때, 나는 그 말이 정확해서 등을 돌렸다. 공동작이라고 찍힌 도록을 그 애 앞에 내려놓고도 나는 아무 말 안 했다. 겹쳐진 지문이며 계약서 마지막 장이며, 갈라선 자리마다 빚은 다 내 쪽이었다. 그건 셈해 볼 것도 없었다.

그런데 사과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순간이 자꾸 눈앞에 그려졌다. 시한부 작가가 절교한 친구에게 눈물로 용서를 빌었다더라. 그 문장이 또 어느 기자의 노트로 옮겨 가고, 좌대 위 캡션처럼 어딘가에 붙는 장면. 나는 내 죽음을 팔았지, 내 사과까지 팔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그 말을 고를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는 세 글자가, 하필 나한테서는 가장 값나가는 재료였다.

갤러리를 나오니 인사동 초입에 해가 낮게 걸려 있었다. 가로수 아래 나무 벤치가 하나 비어 있어서 거기 앉았다. 손끝을 내려다보니 아까보다 더 하얬다. 요즘은 저녁만 되면 손톱 밑까지 핏기가 빠졌다. 나는 방명록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표지의 갈색 무늬가 내 허벅지 온기에 조금이라도 마르나 보다가, 전화를 걸었다.

세 번째 신호음에 받았다.

“왜.”

딱 한 글자였다. 그 안에 아직 안 풀린 앙금과, 이미 반쯤 풀린 반가움이 같이 들어 있었다. 나는 사과를 준비하지 않았으므로 준비한 말이 없었다. 대신 이렇게 물었다.

“너 뚜껑 열어봤냐.”

잠깐 조용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픽, 하고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났다.

“미쳤냐 진짜. 그걸 어떻게 열어. 유리 상자 안에 있는데.”

“그럼 안쪽 못 봤네.”

나는 뚜껑을 열면 보이는 안벽을 떠올렸다. 성형할 때 손톱으로 눌러 둔 그 홈. 불을 지나고도 유약이 흘러들지 않아 그대로 남은 자리. 아무도 못 봤고, 도록에도 기사에도 없는 한 줄. 재인한테도 말하지 않았고, 그 애도 캐묻지 않았다. 우리 사이엔 원래 안 캐묻는 게 있었다.

“네 글씨 봤어. 나쁜 년이라며.”

“사실이잖아.”

그 애가 먼저 웃어 버렸다. 나는 그제야 어깨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봄부터 나는 늘 무언가를 세거나 재거나 계산하는 자세로 앉아 있었는데, 이 벤치에서는 잠깐 아무것도 세지 않고 있었다.

“두 시간 기다렸다며. 왜 말 안 하고 또 왔어.”

“네가 인삿말에서 원고 접는 거 보고 열받아서 그날은 그냥 갔지. 근데 그릇이 자꾸 눈에 밟혀서. 다시 봤어.”

“그래서.”

“좋더라고. 나쁜 년아.”

세 번째 나쁜 년이었다. 그 애는 나쁜 년이라는 말을 다른 사람이 이름 부르듯 썼다. 정확히 발음해 주던 어떤 노인의 방식과는 반대편에서, 재인은 나를 그렇게 불렀다. 나는 둘 다 나쁘지 않았다.

“밥은 먹었냐, 이 나쁜 년아.”

그 애가 다시 물었다. 아까 부산에서 엄마가 밥그릇을 뺏어 가던 손이 잠깐 겹쳐 왔다. 다들 나한테 밥을 물었다. 아프냐고 묻는 대신 밥은 먹었냐고. 나는 그게 그들 나름의 어법이라는 걸 이제 알았다.

“먹었어. 반 그릇.”

“반 그릇이 어디 밥이냐.”

“충분해.”

해가 건물 뒤로 넘어가고, 벤치 그늘이 길어졌다. 나는 무릎 위 방명록을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 저 안에는 남이 쓴 문장이 가득했고, 뚜껑을 덮은 유리 상자 안에는 아무도 못 읽을 문장 하나가 닫혀 있었다. 세지 않기로 한 날들 중 하루가, 그렇게 조용히 저물어 갔다. 나는 내 안에 남은 며칠을, 아직 열지 않은 뚜껑처럼 그냥 닫아 둔 채로 두었다. 재인은 저녁 뭐 먹을지를 혼자 한참 늘어놓고 있었고, 나는 끊지 않고 듣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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