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들어갈 그릇3화 / 전 32화2

1부 선고와 흙

3화. 흙의 단면에 남은 서명

윤서리


복사기가 종이를 뱉는 소리로 행정실 창구가 차 있었다. 조교는 내 배속 신청서를 받아 형광등 아래로 들더니, 한 번 보고 다시 봤다.

“이거, 지도 교수란에 문 교수님이 직접 쓰셨네요.”

조교의 손끝이 서명란에 얹혔다. 승인 도장은 붉게 찍혀 있었고, 그 아래 이름 석 자가 만년필로 눌러 쓰여 있었다. 획이 끝나는 자리마다 잉크가 살짝 번져 종이 속으로 스며 있었다. 나는 도장이 필요했을 뿐인데, 그가 준 건 도장이 아니라 자기 이름이었다.

“이런 건 저도 처음 봐요. 보통 승인만 하시거든요.”

나는 서류를 받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손톱 밑에 어제 씻어도 안 지워진 흙이 아직 검게 껴 있었다. 신청서 모서리를 쥐는데 회색 자국이 종이 끝에 옅게 묻어났다. 나는 그 자국을 손끝으로 문질러 폈다. 지워지지 않고 더 번졌다.

이 사람은 나를 학생으로 받은 게 아니라 재료로 받은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창구 앞에서 처음 지나갔다. 흙 묻은 종이를 접으면서, 나는 그 생각이 불쾌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았다. 재료가 된다는 건 쓰인다는 뜻이었다. 쓰이려면 일단 골라져야 한다.

복도로 나오자 재인이 벽에 기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왔어?”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재인이 신청서를 낚아챘다. 서명란을 보더니 얼굴을 구겼다.

“진짜 직접 썼네. 미친.”

“도면이 마음에 들었나 보지.”

“그게 마음에 들 도면이야? 니가 들어갈 항아리잖아.”

재인은 말해놓고 자기가 먼저 웃었다. 웃음을 거두는 게 반 박자 늦었다. 나는 그 반 박자를 못 본 척했다. 재인의 눈이 잠깐 나를 훑고 지나갔다. 웃고 있으면서도 웃지 않는 눈이었다.

“원로가 요절할 뻔한 학생 하나 봐주는 미담, 뭐 그런 거 아닐까.”

농담처럼 던졌다. 재인은 신청서를 내 가슴팍에 도로 밀어붙였다.

“미담 좋아하시네. 그 인간, 남 얘기 재료로 잘 쓰기로도 유명해.”

“쓰면 좀 어때. 어차피 내 얘기 하는 것도 아니고.”

“윤서리.”

재인이 내 이름을 불렀다. 그렇게 부를 때는 항상 화가 나기 직전이었다.

“십 년이야. 그 인간 학생 지도 안 한 지. 조교도 안 붙이고 혼자 처박혀 있던 인간이 갑자기 왜 너를 지도란에 직접 적냐고. 그게 안 이상해?”

“이상하지.”

“이상한데 왜 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상한 걸 알면서도 가고 싶다는 말은, 재인 앞에서 소리 내기엔 너무 앞뒤가 안 맞았다.

재료. 두 번째였다. 오늘 안에서만 두 번. 나는 그 단어가 나를 두 번째로 스치는 순간 이상하게 안도했다. 골라진 게 실수가 아니라는 확인 같았다. 재인은 걱정으로 그 말을 했고 나는 그걸 알았지만, 안도했다는 건 재인에게 말하지 않았다.

“조심해. 너 지금 상태에서 저런 인간이랑 단둘이.”

“단둘이 뭐. 흙 만지는데.”

재인이 뭐라 더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나는 신청서를 반으로 접어 가방에 넣었다. 흙 자국이 묻은 모서리가 안쪽으로 접혀 들어갔다.

연구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밀고 들어가자 물먹은 흙 냄새가 먼저 나를 맞았다. 오래 껴입은 스웨터 냄새가 그 밑에 깔려 있었다. 창은 하나뿐이었고 블라인드가 반쯤 내려와 있어서, 빛이 작업대 위로만 좁게 떨어졌다. 벽을 따라 짜 넣은 나무 선반에는 초벌만 하고 유약을 안 입힌 그릇들이 줄지어 있었다. 어느 것도 짝이 맞지 않았고, 하나같이 회색으로 말라 있었다. 바닥에는 마른 흙가루가 밟히는 소리를 냈다. 오래 쓸고 오래 밟은 자리 특유의, 아무리 쓸어도 남는 가루였다.

교수는 작업대에 앉아 흙덩이를 손바닥으로 누르고 있었다. 앉으라는 말은 없었다.

“그 도면. 뚜껑 어깨는 아직도 그대로 두고 왔습니까.”

고개를 들지도 않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했다. 며칠 밤을 만졌지만 어깨 곡선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나도 몰랐다.

교수의 손이 흙을 눌렀다. 손등에 힘줄이 도드라졌다가 가라앉았다. 마디가 굵고 손톱이 짧게 잘려 있었다. 그 손은 흙을 쥐는 게 아니라 흙 안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눌렀다 놓고, 방향을 틀어 다시 누르고, 밀려난 자리를 손바닥 아래쪽으로 되쓸었다. 흙덩이가 조금씩 낮아지고 넓어졌다. 서두르는 데가 한 군데도 없었다. 나는 그 손을 보면서, 이 사람이 왜 나를 골랐는지 알고 싶다는 것과 알면 안 된다는 것 사이에서 계산하고 있었다. 도면이 좋아서일 리는 없다. 유골함 도면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유골함을 그린 학생이 궁금했던 것이다. 나라는 재료가 아니라, 나라는 재료가 담고 있는 것이.

교수가 손을 멈췄다. 그 정적 속에서 구석에 놓인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뚜껑 없는 백자 항아리였다. 유약을 입히다 만 자리가 얼룩덜룩했고, 아가리가 휑하게 벌어진 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오래 거기 있었던 물건 특유의 자세로, 아무도 손대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무슨 작품이냐고 물으려는데, 교수의 손가락이 다시 흙을 파고들었다. 마디 굵은 손끝이 흙의 습기를 눌러 물자국을 냈다. 흙이 손을 따라 고요히 밀려났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물어야 할 자리를 놓친 게 아니라, 물으면 안 되는 자리라는 걸 알았다.

“앉으세요.”

그가 이제야 말했다. 나는 작업대 맞은편 등받이 없는 나무 의자에 앉았다. 앉고 나서야 그 의자가 내 자리로 오래 비어 있던 자리라는 걸 알았다. 다른 것들과 달리 흙가루가 얇게 앉아 있지 않고 반들거렸다.

“안을 채우려고 오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교수는 흙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릇을 배우러 온다면서, 실은 자기 속을 무언가로 채우고 싶어서 옵니다. 그런 손은 흙을 이깁니다. 흙이 손 안에서 지쳐요.”

그가 손을 뗐다. 눌리다 만 흙덩이가 그의 손자국을 그대로 물고 있었다.

“여기선 안을 채우는 법을 안 가르칩니다. 비우는 법만.”

손바닥에 열이 고였다. 승인받고 싶은 건지 그 손에 만져지고 싶은 건지 분간이 안 되는 열이었다. 나는 배속되었다고 생각했다. 학과에, 이 남자에게, 그리고 아직 이름도 못 붙인 어떤 거래에.

교수가 흙덩이를 반으로 갈랐다. 갈라진 단면이 젖어 번들거렸다. 그는 그 단면을 내 쪽으로 돌려놓았다.

“다음 주에 물레 앞으로 오세요. 손부터 봅시다.”

손부터 보자는 말이 지도의 첫 문장이었다. 나는 흙 자국이 묻은 신청서를 가방 안에 그대로 둔 채 연구실을 나왔다. 문을 닫는데 경첩이 마른 소리를 냈다. 복도의 찬 공기가 손등에 닿았다. 손톱 밑의 흙은 연구실 안에서보다 더 검게, 더 마르게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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