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들어갈 그릇2화 / 전 32화7

1부 선고와 흙

2화. 안이 비어야 하는 그릇

윤서리


“도시와 소멸입니다.”

내 앞 순서였던 애가 폐공장 사진을 넘기며 말했다. 심사석의 교수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안경을 밀어 올린 교수가 “폐허의 질감이 좋네” 하고 형식적으로 두어 마디를 던졌다. 나는 이젤 옆에서 순서를 기다리며 창밖을 봤다. 개나리가 지고 있었다. 피는 건 봤는데 지는 건 처음 눈에 걸렸다. 노란 게 갈색으로 주저앉는 속도가 이상하게 정확해 보였다.

“윤서리.”

조교가 이름을 불렀다. 나는 A2로 뽑아 온 도면을 이젤에 걸었다. 높이 이십오 센티, 넉넉한 뚜껑, 무광 유약. 단면도 옆에 깨알같이 적어 둔 치수들이 형광등 아래서 유난히 도드라졌다. 손바닥으로 도면 아래쪽을 한 번 눌러 폈다.

“제 졸업작품은 유골함입니다.”

거기서 멈췄어도 됐다. 유골함이라는 단어만으로도 심사석의 펜이 잠깐 멈추는 게 보였으니까. 그런데 나는 굳이 한 문장을 더 얹었다.

“제가 들어갈 유골함을 만들겠습니다.”

강의실이 술렁였다. 어디선가 짧은 웃음이 터졌다가, 그게 민망하게 꺼지는 소리까지 다 들렸다. 앞줄 교수가 옆자리에 몸을 기울였다.

“컨셉이 좀 과하지 않나.”

소곤거린다고 소곤거린 모양인데 다 들렸다. 나는 그 술렁임이 싫지 않았다. 재인 앞에서 농담이라고 둘러댔던 문장이 지금 심사석을 흔들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이 방에 나뿐이었다. 진담을 농담의 얼굴로 파는 일에 나는 이미 익숙했다. 창가 둘째 줄에서 재인이 나를 빤히 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눈이 마주치면 도면이 흔들릴 것 같아서, 나는 뚜껑 곡선만 봤다. 어깨에서 목으로 올라가는 그 선. 내가 며칠 밤을 만졌는데도 아직 마음에 안 드는 선.

“과한 게 아니라 정직한 겁니다.”

나는 그렇게 말할 뻔했지만 삼켰다. 정직 같은 단어는 심사석에서 값이 떨어진다. 대신 치수를 짚었다.

“성인 화장 후 유골 부피를 기준으로 잡았습니다. 여기가 최소 용적이고, 뚜껑은 넉넉하게 열립니다.”

“열려서 뭘 하게.”

앞줄 교수가 물었다. 진짜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라 나를 앉히려고 묻는 거였다.

“채우려고요.”

내 대답에 강의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채운다는 말이 뭘 채우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그때 맨 뒷줄에서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심사 내내 팔짱을 낀 채 한마디도 하지 않던 남자가 천천히 일어섰다. 문학수 학과장. 나는 그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지도 잊고 있었다.

“윤서리 학생.”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서리, 마지막 음절의 잔향을 흘리지 않고 또렷하게. 출석부에서 ‘윤서’까지 부르다 뒷음절을 흘리던 다른 교수들과 달랐다. 이름이 제대로 불렸을 뿐인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내 이름이 원래 이렇게 생긴 소리였구나 싶었다.

“그 뚜껑 곡선.”

그가 통로를 걸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느린 걸음이었다.

“유골함이라기엔 어깨가 너무 섰습니다. 이건 항아리가 아니라 사람 어깨를 그린 도면이에요.”

나는 뚜껑 곡선을 다시 봤다. 며칠 밤 마음에 안 들었던 이유를 그가 한 문장으로 짚어 버린 게 분했다.

“안이 비어야 하는 그릇을, 학생은 지금 바깥부터 그렸군요.”

그가 이젤 앞에 멈춰 섰다. 가까이 오자 스웨터에서 냄새가 났다. 향냄새 같기도 하고, 오래 물먹은 흙냄새 같기도 한 것. 도예를 오래 한 사람 몸에 배는 냄새라고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때는 그냥 낯설고 축축했다.

“안은 아직 못 정했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가 도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정하는 게 아니라 비우는 겁니다.”

그는 도면을 오래 들여다봤다. 다른 교수들처럼 두어 마디 던지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단면도 안쪽의 빈 공간을 눈으로 파내려는 사람처럼 봤다. 내가 그려 넣지 않은 부분을 보고 있었다.

“이 도면, 다시 봅시다.”

그가 도면에서 눈을 떼고 나를 봤다.

“내 연구실로.”

끝을 질문처럼 올렸는데 질문이 아니었다. 거절할 자리를 만들어 주는 척하면서 거절할 수 없게 만드는 말투. 나는 대답을 못 하고 그냥 서 있었다. 심사석의 다른 교수가 뭐라고 정리하는 말을 했고, 다음 순서 애가 이젤 앞으로 나왔지만, 나는 내 이젤에서 도면을 걷어 내리는 동안 그 문장만 곱씹었다.

내가 이 방에서 원한 건 승인이었다. 저 유골함이 작품이 된다는 도장. 근데 그가 준 건 승인이 아니라 초대였다. 승인은 끝나는 말이고 초대는 시작하는 말이라는 걸, 나는 도면을 둥글게 말면서 알았다. 시작하는 쪽이 훨씬 위험했다.

자리로 돌아와 앉는데 재인이 옆으로 붙었다.

“미쳤냐 진짜. 저 인간이 왜 너한테.”

재인이 낮게 말했다. 학생 지도 안 하기로 유명한 사람이라고, 십 년 넘게 아무도 안 맡았다고 했다. 나는 대답 대신 말아 쥔 도면을 봤다. 손바닥이 축축했다. 도면 겉면에 손자국이 얇게 배어 나왔다.

앞에서는 다음 애가 자기 주제를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안 들렸다. 손톱 밑을 봤다. 어제 비누로 두 번 씻어도 안 지워진 흙이 여전히 검게 껴 있었다. 그 흙 밑으로, 나는 벌써 그 연구실 문 앞까지 걸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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