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들어갈 그릇1화 / 전 32화13

1부 선고와 흙

1화. 마른 눈가와 젖은 흙의 치수

윤서리


의사는 내 눈을 보지 않았다. 모니터에 뜬 무언가를 향해 “길어야 여섯 달”이라고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료실 의자는 봄인데도 차가웠다. 등받이에 닿은 셔츠 안쪽이 서늘해지는 걸 느끼면서, 나는 마우스를 쥔 의사의 손가락이 화면 어디쯤을 클릭하는지 지켜봤다. 담도. 전이. 여섯 달. 단어들이 순서대로 지나갔고, 나는 그중 어느 것에도 손을 뻗지 않았다.

“보호자분은 같이 안 오셨어요?”

“혼자 왔는데요.”

의사가 잠깐 나를 봤다. 눈이 마주친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는 처방전을 접어 가방에 넣고 일어섰다. 다리에 힘이 빠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몸이 이상하게 가벼웠고, 그 가벼움이 조금 이상했다.

병원 복도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했다. 그 냄새를 밀어내며 걷는데, 먼저 떠오른 건 죽음이 아니었다. 아직 주제도 못 낸 졸업작품이었다. 나는 걸으면서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성형에 두 달. 엄지를 접었다. 완전 건조까지 보름. 검지. 초벌 굽고, 유약 올리고 다시 재임. 중지와 약지. 학교 가마는 한 달에 두 번밖에 안 돈다. 대기 줄까지 넣어도 늦가을 졸업전시에는 맞출 수 있다. 나는 복도 끝 창 앞에 서서 접었던 손가락을 다시 폈다 오므렸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람들 틈에서 나 혼자 개월 수를 세고 있었다. 눈물이 나올 자리에 가마 예약표가 먼저 들어와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손등으로 눈가를 훔쳐 보았다. 젖어 있지 않았다. 마른 눈가를 만지작거리다가, 나는 손을 내리고 계단 쪽으로 걸었다.

지하철역 계단 앞에서 나는 집으로 가는 대신 반대편으로 돌았다. 학교까지는 두 정거장이었다.

오후 두 시의 도예 실기실은 비어 있었다. 다들 강의에 들어갔거나 점심을 먹으러 나간 시간이었다. 창으로 든 봄볕이 물레 위에 내려앉아, 공기 중을 떠도는 먼지를 한 올 한 올 세워 놓고 있었다. 나는 구석 선반에서 마감 지난 흙 봉지를 하나 꺼냈다. 누가 쓰다 남기고 이름표도 안 붙여 둔 것이었다. 비닐을 뜯자 축축한 흙냄새가 손목까지 올라왔다. 쇠 냄새 같기도 하고 비 온 뒤 흙 마당 냄새 같기도 한 그것을 나는 오래 맡았다.

아무 목적도 없이 흙을 떼어 주물렀다. 손바닥의 온도가 흙으로 옮겨가고, 흙의 습기가 내 지문 사이로 스몄다. 물레를 돌리지도, 형태를 잡지도 않았다. 그냥 쥐었다 폈다 했다. 손안에서 흙이 데워지는 동안, 실기 첫 학기에 강사가 지나가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릇은 속이 비어야 완성된다. 채우려고 만드는 게 아니라 비우려고 만드는 거라고. 그때는 그냥 멋 부리는 말인 줄 알았다.

손안의 흙을 내려다보다가, 나는 내가 들어갈 항아리를 떠올렸다. 유골함. 내 것. 내 손으로 빚은 것. 뼈만 남은 나를 담을, 속이 비어야 완성되는 그릇. 손끝이 흙을 파고들 때 명치 아래에서 무언가가 조여들었다. 심장이 한 박자 빠르게 뛰었고, 나는 손가락을 더 깊이 밀어 넣었다. 어림잡아 높이 25센티, 뚜껑은 넉넉하게. 굽을 어떻게 깎을지, 유약은 무광으로 갈지까지 벌써 머릿속에서 굴러가고 있었다. 시한부 진단을 받고 온 사람이 자기 담을 그릇 치수를 재고 있다니. 나는 흙을 도로 뭉쳐 봉지에 넣지 못하고, 손바닥에 든 그것을 조금 더 오래 쥐고 있었다. 뺨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져서 나는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야, 오늘 병원 간다더니 여기서 뭐 하냐.”

재인이었다.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친 채 들어오던 그 애가 흙 묻은 내 손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문을 반쯤 열어 둔 채, 들어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정하지 못한 사람처럼 서 있었다.

“졸업작품 주제 정했어.” 나는 흙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뭔데.”

“유골함. 내 거.”

재인이 짧게 웃었다. 실없는 소리라고 생각한 웃음이었다. 그러다 내 얼굴을 보고 웃음을 거뒀다. 가방이 어깨에서 흘러내렸는데도 고쳐 메지 않았다.

“미쳤냐 진짜. 뭔 소리야 그게.” 재인이 문을 닫고 두어 걸음 다가왔다.

여섯 달, 이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가 도로 가라앉았다. 나는 그 말을 재인 앞에서 꺼내지 못했다. 대신 손에 쥔 흙을 툭 떼어 물레 위에 올렸다.

“농담이야. 컨셉이.”

재인은 믿지 않는 얼굴이었다. 나를 한참 내려다보다가, 그래도 더 캐묻지 않고 내 옆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다리 하나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흙 봉지에서 한 덩이를 떼어 자기 손으로 가져가더니, 별말 없이 주무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기실에는 두 사람이 흙을 이기는 소리, 손바닥이 젖은 흙을 누르는 물컹한 소리만 났다. 봄볕이 물레에서 조금씩 물러나 벽 쪽으로 옮겨 갔다.

“너 손 왜 이렇게 차.”

재인이 문득 말했다. 자기 흙을 보면서 한 말이었지만, 목소리가 아까보다 낮았다.

“원래 차.”

“거짓말.”

재인이 흙 주무르던 손을 멈췄다. 그러고는 흙 묻은 손등으로 내 손목을 툭 밀어 왔다. 자기 손도 차가운 주제에, 뭘 확인하려는 건지 잠깐 대고 있었다.

“밥은 먹었냐.”

“아니.”

“그럴 줄 알았어.” 재인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흙으로 눈을 내렸다. 밥 먹으러 가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각자의 흙을 마저 뭉쳤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나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는 다 쓴 볼펜 몇 자루, 학기 초에 받은 실기실 열쇠, 유통기한 지난 두통약이 굴러다녔고, 그 밑에 병원에서 받아 온 봉투가 놓여 있었다. 나는 봉투를 꺼내 볼펜을 들었다. 받는 사람 자리에 엄마 이름을 적었다. ㄱ 자를 긋는데 볼펜 끝이 봉투의 얇은 결에 살짝 걸렸다. 그 아래 부산 주소를 한 줄 한 줄 적어 내려갔다. 진단서가 든 봉투였다. 우표를 붙이려고 서랍을 뒤지다가, 나는 손을 멈췄다.

봉투를 도로 서랍 맨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부치지 않은 채로. 볼펜과 열쇠를 그 위에 다시 올려 흔적을 덮었다. 손끝으로 봉투를 끝까지 밀어 넣으면서, 이걸 언제 어떻게 꺼낼지, 누구에게 먼저 알릴지를 벌써 셈하고 있는 나를 느꼈다. 여섯 달이라는 시간이 이제 나만 아는 재고였고, 나는 그것을 어떻게 풀어놓을지 정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서랍을 닫았다. 손톱 밑에 낀 흙이 아직 마르지 않아, 비누로 두 번 씻어도 잘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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