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빙렬
28화. 안쪽에 남겨둔 비워둔 자리
전시가 끝나고 사흘, 큐레이터가 전화로 숫자부터 불렀다.
“문의가 벌써 아홉 건이에요.”
나는 침대에 반쯤 기대앉아 창을 보고 있었다. 자취방 창이 좁아서 은행나무 한 그루의 절반쯤만 담겼다. 노란 잎이 한 장 떨어지면 하나, 또 한 장 떨어지면 둘. 세는 버릇은 병원에서 남은 개월을 세던 때 붙은 것이라, 이제는 셀 게 없어도 손이 먼저 셌다.
“두 곳은 지방 미술관이고요. 한 분은 개인 컬렉터인데, 값은 부르는 대로 맞추시겠대요.”
부르는 대로. 봄부터 나는 줄곧 그 문장 안에서 살던 사람이었다. 값을 매기는 쪽에 서 본 적은 없고, 값이 매겨지는 쪽으로만 놓였다. 여섯 달이라는 값, 스물일곱이라는 값. 잎을 몇 장째 세던 건지 놓쳤다.
“캡션 바꿔 주세요.”
“네?”
“비매요. 비매라고 쓰고, 그 밑에 작게 사용 예정.”
수화기 저쪽이 잠깐 조용해졌다.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작가님, 그거…… 오히려 더 달려들 텐데요.”
알고 있었다. 팔지 않겠다는 말이 이 바닥에서 얼마나 비싼 값이 되는지. 안 판다고 못 박은 그릇에 사람들이 어떻게 몰려드는지. 봄부터 나는 그 수업을 들은 학생이었고, 이번에는 답을 아는 채로 시험을 치는 셈이었다.
“그래서요.”
큐레이터는 더 말리지 않았다.
이틀 뒤 갤러리에 들렀다. 좌대 앞 아크릴판에 새 문구가 끼워져 있었다. 내 이름 아래 ‘비매(非賣)’라고 적혔고, 그 밑에 더 작은 글씨로 ‘사용 예정’이 붙었다. 재료명도 없고 연도도 없었다. 산화 소성이니 무광이니 하는 설명이 없는 게 마음에 들었다. 설명을 붙이는 순간 그릇은 물건이 되고, 물건에는 등급이 따라붙는다.
유골함은 조명 두 대를 받아 어깨선까지 환했다. 다만 뚜껑 안쪽, 성형 때 손톱을 박아 남긴 자국은 빛이 닿지 않는 자리에 있었다. 불을 지나고도 유약이 흘러들지 않은 그 홈만 그림자 안에 남아, 조명 바깥으로 밀려나 있었다. 나는 그게 어느 각도에서도 안 보이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좌대에서 물러섰다.
종이컵을 들고 서 있는데 코트 좋은 중년 남자가 다가왔다. 명함을 먼저 내밀었다.
“이거, 정말 안 파시는 겁니까?”
나는 명함을 받지 않았다.
“사용 예정이라는 게, 그, 무슨…… 소장 개념입니까? 아니면 다른 작품 재료로 쓰신다는.”
그의 눈이 내 얼굴을 훑고, 손목을 지나, 유골함으로 옮겨 갔다. 봄부터 여러 번 본 경로였다. 병을 먼저 읽고 사람을 나중에 읽는 순서.
“제가 들어갈 거예요.”
짧게 끊었다. 남자는 반 박자 멎었다.
“아……”
명함을 도로 넣지도 못한 채 손에 쥐고 뒷걸음질 쳤다. 나는 그 어색함이 손에 든 커피보다 조금 더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커피는 진작 식어 있었다. 남자가 밀고 나간 유리문으로 늦은 오후의 빛이 잠깐 들어왔다가 닫혔다.
일주일이 지나자 그 문구가 기사가 되었다. 제목은 「죽음은 팔지 않는다: 시한부 작가의 마지막 선언」. 봄에 내 병명을 처음 활자로 박아낸 그 잡지의 후속이었다. 그때는 내가 팔리는 물건이었고, 이번엔 내가 팔지 않겠다고 한 것마저 물건이 되어 있었다. 안 파는 행위에도 값이 매겨진다는 걸, 기자는 나보다 빨리 알았다.
재인이 링크와 함께 문자를 보냈다.
“미쳤냐 진짜, 안 판다는 것도 기사 나네ㅋㅋ 너 이제 안 파는 걸로 유명해짐”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답을 쳤다.
“시장이 못 삼키는 것도 시장 얘깃거리더라”
재인은 한참 뒤에 답했다.
“그니까 넌 죽어도 안 삼켜질 거야, 걔들이”
나는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안벽에 손톱을 박아 홈을 낸 건, 삼켜지지 않으려고 판 자리였다. 유약이 흘러들지 못하게, 아무의 지문도 앉지 못하게 비워둔 자리. 그런데 삼켜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자리가 다시 기삿거리가 되고, 안 팔리는 그릇이 안 팔린다는 이름으로 팔려 나갔다. 우스운 순환이었다.
우습다고 느끼는 감각이 분노보다 가볍다는 건 가마의 불을 지난 뒤에 알았다. 1300도를 통과하고 나면 어떤 흙은 유리가 되고, 어떤 흙은 부서지고, 어떤 감정은 그냥 재로 앉는다. 봄이었으면 나는 이 기사에 이를 갈았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저 문장을 되받아칠지, 어느 자리에서 판을 뒤집을지 밤새 계산했을 것이다. 지금은 계산이 잘 서지 않았다. 서지 않는 게 편했다.
재인에게는 답을 보내지 않았다. 대신 화면을 껐다.
창밖에서 은행잎이 마저 떨어지고 있었다. 아까부터 세다 놓친 그 나무였다. 한 장이 유리에 붙었다 미끄러지고, 또 한 장이 그 뒤를 따라 내려갔다. 몇 장째인지 세려다가, 나는 세지 않았다. 뚜껑 안쪽의 그 홈처럼, 세지 않고 그냥 비워두는 자리도 하나쯤 있어야 했다. 그게 오늘은 은행잎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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