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불
27화. 비어 가는 그릇과 채워질 그릇
박수는 짧았다. 그 뒤가 길었다.
여덟 시가 넘어가자 조명 아래를 메우던 사람들이 명함과 인사를 흘리며 문 쪽으로 빠져나갔다. 큐레이터는 방명록을 챙겨 사무실로 사라졌고, 마지막으로 남은 발소리가 유리문에 부딪혔다가 잦아들었다. 전시장이 비자 냄새가 남았다. 유약이 마르고 남은 광물 냄새, 그리고 하루 종일 사람의 체온을 받아 미지근해진 좌대의 목재 냄새. 나는 그 냄새 한가운데에 혼자 서 있었다.
문 교수는 아내의 백자 앞에 서 있었다. 무기명 캡션만 붙은 좌대 위에서, 이십 년 만에 목을 얻은 항아리가 매끈한 어깨를 켜 두었다. 가마에서 나온 실금은 내 유골함에서 그의 백자로 건너가 얇게 번져 있었다. 같은 불을 지난 두 그릇이 서로의 살에 같은 결을 나눠 가진 것이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가 흙 얘기를 꺼내며 문장을 길게 늘일 줄 알았다. 곡선이 어떻고 소성이 어떻고, 명령을 질문의 얼굴로 감추면서. 그런데 이번엔 아니었다.
“고맙습니다.”
낮고 짧았다. 평소의 버릇이 그 말에는 없었다. 질문처럼 끝을 올리지도, 대답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나는 용서한다는 말을 고르지 않았다. 괜찮다는 말도. 그런 말들은 내 몸속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원한도, 승인 욕구도, 이미 천삼백 도 안에서 다 타고 재가 되어 나온 뒤였다. 나는 대신 손을 내밀었다. 흙이 말라 갈라진, 항암으로 손톱 밑까지 창백해진 손을.
그가 그 손을 쥐었다. 늙었고, 따뜻했다. 물레 위에서 내 손 위로 겹쳐 오던 그 손이었는데, 이번엔 무게가 달랐다. 나를 어딘가로 끌고 가려는 힘이 빠져 있었다. 그냥 악수였다. 손과 손이 만나 각자의 온도만 확인하고 놓는.
“손 떨림은요.”
그가 물었다.
“오늘은 안 떨려요.”
거짓말이었다. 손끝은 아까 인삿말을 읽지 않고 접을 때부터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악수의 무게만큼은, 그 떨림이 그의 손바닥에 눌려 잠깐 고요해졌다. 그러니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우리는 각자의 그릇 앞으로 갈라졌다. 나는 내 유골함 앞으로, 그는 아내의 백자 앞으로. 두 항아리는 팔짱 낀 거리만큼 떨어져 좌대 위에 나란했다. 조명이 절반 꺼진 뒤라 어깨선의 실금이 아까보다 깊은 회색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뚜껑을 열지 않았다. 열어 볼 필요가 없었다. 안벽에 새겨 둔 초승달 자국은 유약도 닿지 않은 채 어둠 속에 그대로 있었다. 불을 통과하고도 지워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아무도 값을 매기지 못할 것이다. 그것만은 팔지 않았다는 확인은 이제 다짐이 아니었다. 그냥 사실이었다. 다짐은 아직 잃을 게 남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나는 그 자리를 이미 확보했다.
문 교수가 자기 항아리 쪽에서 낮게 말했다.
“이 사람이, 이제야 좀 편해 보입니다.”
나는 그가 백자를 말하는 건지 죽은 아내를 말하는 건지 묻지 않았다. 둘 다였을 것이다. 이십 년을 임시 플라스틱함에 담겨 있던 재가 드디어 들어갈 자리를 얻었다는 안도가 그의 목소리에 얹혀 있었다. 그 안도가 나는 밉지 않았다. 미워하기엔 우리 둘이 만든 게 너무 닮았다. 그는 죽은 사람의 자리를 이십 년 미뤘고, 나는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의 자리를 반년 앞당겨 팠다. 방향만 반대였지, 손이 하는 일은 같았다.
유리문 밖에서 그림자가 움직였다. 재인이 코트 깃을 세운 채 서 있었다.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고, 문틈으로 얼굴만 들이밀었다.
“빨리 나와. 얼어 죽겠다.”
그건 오프닝 내내 참았던 말을 겨우 하나 골라 던진 것 같았다. 절교 후 처음으로 내 전시장에 온 애가, 두 시간을 서성이다 고른 문장이 그거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두 그릇을 돌아보았다. 내 것은 뚜껑을 덮어 안이 완전히 비어 어두웠고, 그의 것은 이제 막 채워질 참이었다. 비어 가는 그릇과 채워질 그릇이 한 뼘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좌대 위에서 둘의 어깨선이 같은 회색으로 내려앉는 걸 보다가, 나는 등을 돌렸다.
“다음 주에 납골당 다녀오시겠네요.”
뒤도 안 보고 말했다.
“네.”
그가 대답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한 글자에 이십 년치 미룸이 다 들어 있었는데, 나는 확인하러 돌아서지 않았다. 확인은 그의 몫이었다. 나는 내 몫을 이미 불에 맡겨 끝냈다.
밖으로 나오자 초겨울 바람이 흙 마른 손등을 훑고 지나갔다. 갈라진 손톱 틈으로 찬 공기가 파고들었다. 재인이 내 팔짱을 세게 끼었다.
“인삿말은 좀 미쳤더라, 진짜.”
그러고는 먼저 웃어버렸다. 정곡을 찌른 뒤 저 혼자 웃는 그 버릇. 나는 웃지 않았다. 대신 재인의 팔이 내 팔 안쪽을 조여 오는 온도를, 물레 위 흙의 습기도 가마의 열도 아닌 그냥 사람의 온도를 느꼈다.
우리는 종로 뒷골목을 걸었다. 나는 남은 소성 회차를 세지 않았고, 남은 개월을 세지 않았고, 갤러리가 받아 갈 지분도 세지 않았다. 등 뒤 유리문 안에서 노인이 자기 아내의 그릇 앞에 여전히 서 있을 텐데, 그 자리를 계산에 넣지 않았다. 오랜만에 아무것도 세지 않고 걸었다. 세지 않으니 걸음이 가벼운 건지, 남은 게 없어서 가벼운 건지는 굳이 나누지 않았다.
재인이 팔짱을 더 세게 끼며 물었다.
“뚜껑, 열어봤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안쪽에 뭐가 새겨져 있는지는, 아직 아무한테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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