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불
26화. 불이 얹은 서명
“이제 열어도 돼요.”
문 교수가 가마 문의 잠금쇠를 풀었다. 밤새 불을 삼켰던 관이 반나절을 식고도 여전히 손등에 열을 뿜었다. 문이 벌어지자 냄새가 먼저 나왔다. 식은 재와 달군 돌, 그리고 오래 참고 있던 무언가가 마침내 숨을 뱉는 냄새.
그가 장갑 낀 손을 먼저 안에 넣었다. 나는 그 어깨 너머로 목을 뺐다.
내 유골함 뚜껑이 거기 있었다. 식으면서 굳은 유약 위로, 가느다란 금이 별처럼 번져 있었다. 얼음이 갈라지는 결을 따라, 아니 얼음이 어는 결을 따라, 어깨선 위를 실금이 뻗어 나갔다.
“이건,” 문 교수가 낮게 말했다. “요변입니다. 불이 한 거예요. 사람은 못 합니다.”
나는 장갑도 없이 그 금을 손끝으로 따라갔다. 갈라졌는데 새지 않는 선이었다. 며칠 전 젖은 흙 위에서 그의 지문과 내 지문이 경계를 잃고 함께 굳었던 자리, 바로 그 어깨 위로 불이 제 서명을 얹어 두 사람의 손을 다 지워 놓았다. 나는 웃을 뻔했다. 이 밤을 이긴 건 나도 그도 아니었다.
옆 칸의 백자를 꺼낼 차례였다. 나는 내화갑에서 미리 빚어둔 뚜껑을 두 손으로 들어 올려, 이십 년째 비어 있던 목 위에 얹었다. 안지름 십육, 목 높이 삼점오. 노트에 적어둔 숫자대로 언저리가 물리며 도자기끼리 부딪는 소리가 났다. 딱, 하고. 짧고 맑았다. 이십 년 만에 닫히는 소리였다.
문 교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큰 손이 항아리 몸통을 아래에서부터 훑어 올라가다 뚜껑 언저리에서 멈췄고, 거기서 오래 머물렀다. 손끝이 잘게 떨리는 것이 벽돌 틈으로 새는 열기 속에서도 보였다. 나는 그가 무엇을 하는지 보지 않으려고, 내 뚜껑에 번진 실금을 하나씩 눈으로 셌다. 하나, 둘, 어깨선을 넘어가면서부터는 갈래가 늘어 셈이 헝클어졌다. 그편이 나았다.
오프닝은 종로의 갤러리, 저녁 여섯 시였다. 조명이 좌대 위 두 항아리를 나란히 비췄다. 내 유골함은 캡션이 길었고, 옆의 백자에는 캡션이 없었다. 무기명. 이름도 사연도 병명도 없이, 뚜껑을 얻은 항아리 하나가 그저 거기 서 있었다. 나는 그 빈자리가 이 전시에서 가장 정직한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도록을 펼쳐 보았다. ‘문학수·윤서리 공동작’ 위에 하얀 정정 스티커가 붙어 있었고, 그 밑에 ‘윤서리’만 남아 있었다. 그가 약속을 지킨 것이다. 밤이 지나면 이름을 지워 달라 요구하려 했는데, 요구하기도 전에 이름이 지워져 있었다. 나는 스티커의 반듯한 모서리를 잠깐 눌러 보고 도록을 덮었다.
단상에 오르기 전, 큐레이터가 원고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요절한 젊은 작가의 마지막 서사, 어쩌고 하는 문장이 굵게 박혀 있었다. 마이크 앞에서 나는 그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스피커가 잠깐 웅웅거렸다. 앞줄의 평론가가 무릎 위에서 명함을 만지작거리다 멈췄다.
“이 작품은,” 목소리가 생각보다 건조하게 나왔다. “제가 죽는다는 이야기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러분이 사신 것도 그 이야기고요.”
몇 사람이 시선을 떨어뜨렸다. 나는 접은 원고를 앞치마도 없는 옷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그런데 이건 비극이 아닙니다. 제가 한 거래입니다. 팔린 게 아니라, 제가 팔았습니다.”
뒷벽 근처에 문 교수가 서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의 눈에서 아까움 대신 다른 것을 보았다. 항복에 가까운 무엇이었다. 저 사람은 이십 년을 미룬 애도를 남의 마감일 위에 얹으려 했고, 결국 제 아내의 목에 뚜껑을 받는 일을 남의 손에 넘겼다. 나는 그를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나를 팔던 자리에 이제 내가 서 있었다.
단상을 내려오니 재인이 문가에 있었다. 코트도 벗지 않고, 팔짱을 낀 채였다.
“미쳤냐 진짜.”
그러고는 먼저 웃어버렸다. 우는 것보다 못한 웃음이었다.
“네가 판다니까, 그나마 봐줄 만하네.”
나는 대꾸 대신 좌대로 갔다. 사람들 어깨 사이를 지나 내 유골함 앞에 서서, 손전등도 없이 뚜껑 아래 그림자 속을 들여다보았다. 안벽에 새겨둔 초승달 모양의 홈이 거기 그대로 있었다. 불을 통과하고도 지워지지 않은 자국. 유약이 흘러 들어가지 못한, 어느 시장도 값을 매기지 못한 우묵한 어둠. 뚜껑을 덮으면 아무도 다시 보지 못할 그곳만은 비어 있었다.
나는 뚜껑을 반쯤 밀어 그 어둠을 덮었다. 손끝에 마른 흙 냄새가 남았다. 등 뒤에서 재인이 무기명 백자 쪽으로 걸어가는 발소리가 들렸고, 문 교수는 여전히 뒷벽에 붙어 나를 보고 있었다. 손님이 다 빠지기 전에는, 우리 셋 중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을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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