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들어갈 그릇25화 / 전 32화7

4부 불

25화. 붉은 관창과 임시의 시간

윤서리


온도계 바늘이 구백을 지날 때, 문 교수가 관창의 덮개를 밀어 열었다. 붉은 구멍이 얼굴 앞에서 벌어졌고, 그 안으로 두 개의 목이 나란히 서 있었다. 어느 것이 내 것이고 어느 것이 그의 아내인지, 그 온도에서는 이미 분간이 되지 않았다. 둘 다 오렌지빛으로 물들어 제 몸의 경계를 지우는 중이었다.

“저기서부터 흙이 유리가 됩니다.” 그가 온도계 눈금을 손끝으로 짚으며 말했다. “표면이 먼저 녹아서 얇게 유리를 입어요. 그다음엔 속까지 열이 걸어 들어가고. 사람 눈에는 여전히 흙덩이지만, 저 안에서는 벌써 다른 물질이 되는 중입니다.”

나는 무릎에 걸친 담요를 끌어올렸다. 그가 내준 낡은 것이었다. 등 뒤 벽돌은 손을 대면 데일 만큼 달아 있는데 얼굴만 마주 뜨거웠고, 담요 밑 다리는 새벽 냉기에 서늘했다. 몸이 두 개의 온도로 나뉜 채, 나는 관창 앞을 떠나지 못했다.

식은 커피가 종이컵 안에서 표면에 얇은 막을 앉혔다. 새벽 두 시. 그가 이렇게 오래 한자리에 붙어 앉아 있는 걸 나는 처음 봤다. 물레 앞에서도 그는 늘 서 있거나 몸을 반쯤 틀고 있던 사람이었다. 지금은 접이의자에 등을 붙이고, 관창의 붉은빛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뚜껑을 자기가 고르겠다고 했어요.”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반말과 존댓말의 경계가 그날은 이상하게 풀려 있었다. “목만 빚어 놓으면, 위는 자기가 얹겠다고. 그릇 안에 뭐가 들어갈지는 들어가는 사람이 정해야 한다는 게, 그 사람 말이었지.”

나는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편이 더 많이 듣게 한다는 걸, 나는 그에게서 배웠다. 손님들 앞에서 내 병을 소개하던 그 침묵의 기술을, 나는 오늘 밤 그대로 그에게 돌려주고 있었다.

“몸통을 빚고 나서 손이 떨어지질 않더군.” 불빛이 그의 얼굴 주름 사이로 흘러 들어와, 골마다 그늘을 앉혔다. “뚜껑을 덮으면 그 사람이 정말로 저 안에 갇히는 것 같아서. 목까지만 열어 두면, 아직 안 끝난 것 같으니까. 안 끝난 건 아직 산 거니까.”

그 문장 앞에서, 나는 이십 년치의 무언가를 똑바로 봤다. 그는 내 죽음을 판 게 아니었다. 자기 애도를 팔 수 없어서, 팔 수 있는 남의 죽음을 대신 진열대에 올렸을 뿐이었다. 내 유골함 어깨선을 눌러 눕히던 손도, 비 오는 밤 젖은 채 겹쳐 오던 체온도, 나를 원해서가 아니었다. 이십 년 전에 덮지 못한 뚜껑을, 내게 주어진 남은 시간 위에 시험 삼아 얹어 보려던 안간힘이었다. 마감일이 정해진 죽음. 그는 그게 필요했던 것이다.

화가 났어야 할 자리였다. 그런데 나는 그의 굽은 등을 재고 있었다. 노인의 목이 앞으로 꺾인 각도, 담요도 없이 붉은 구멍만 들여다보는 어깨의 기울기. 나는 그것을 유골함의 어깨선을 재던 눈으로 재고 있었다.

“교수님.” 내가 불렀다. “이번 불로 저 목이 살아 나오면, 뚜껑은 벌써 재 뒀어요. 안지름 십육, 목 높이 삼점오.” 노트에 적어 둔 숫자였다. 그의 아내 항아리 입술을 줄자로 재던 날, 그가 잠깐 내 손목 밑을 받쳐 줬던 그 숫자.

그는 대답 대신 관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불을 향해 말하듯 입술을 움직였다.

“그 사람 유골이, 이십 년째 납골당 플라스틱 함에 있어요.” 소문으로 몇 번이나 들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로 듣는 건 처음이었다. 소문은 남이 옮기는 말이고, 이건 자기가 스스로 여는 문이었다. “임시함이라고 부르더군. 이십 년을 임시로 뒀어요. 임시라는 말이 그렇게 길어질 수 있는 줄, 나도 몰랐지.”

온도계가 천백을 지났다. 냄새가 바뀌었다. 재와 젖은 돌과, 무언가 영원히 봉해지는 냄새. 유약이 녹기 시작하는 냄새였다.

“터지면요.” 내가 물었다. “둘 중 하나가 터지면, 어느 쪽입니까.”

“터지는 건 대개 안에 공기를 가둔 쪽입니다.” 그가 말했다. 흙과 불 얘기를 할 때만 그의 문장은 길어졌다. “성형할 때 벽 사이에 기포를 남겨 두면, 그게 천도 넘어서 부피가 팽창하면서 몸을 찢어요. 반대로 속을 깨끗이 비워낸 그릇은 불을 그냥 통과시킵니다. 열이 안팎을 똑같이 지나가니까, 찢을 게 없거든. 가둔 게 없으면 안 터져요.”

나는 내 항아리 안벽을 떠올렸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그 우묵한 면. 손님들이 다녀간 밤에 내가 홀로 새겨 둔 자국이, 그 홈만은 그의 지문도 갤러리의 캡션도 닿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안에 아무것도 가두지 않았다. 그러니 내 것은 불을 통과할 것이었다. 살아 나올 것이었다. 그가 만든 규칙대로.

붉은 구멍 안에서 두 목이 함께 달았다. 이십 년을 임시로 미뤄 온 목과, 여섯 달을 받고 시작해 이제 두 달로 줄어든 목이, 같은 온도로 같이 유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그 옆얼굴을 오래 봤고, 오래 붙들고 있던 무언가가 그 자리에서 조용히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승인 욕구였는지 그 비슷한 것이었는지, 나는 물레 위에 겹쳐 오던 손을 밀어내지 않았던 밤들을 여러 번 심문했다. 그 자리로 지금 다른 것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가 가엾었다. 뚜껑 하나를 이십 년 동안 손에 못 쥔 남자가, 남의 마감일을 빌려서라도 그것을 끝내 보려던 것이.

가엾다는 건 위험한 감정이었다. 경멸보다 위험하고, 승리보다 위험했다. 경멸은 사람을 밀어내지만 연민은 끌어당긴다. 나는 이 밤이 지나면 도록에서 내 이름을 지워 달라 요구할 참이었고, 그러려면 그를 밀어내야 했다. 그런데 붉은 구멍 앞에서, 나는 자꾸 그의 식은 커피를 다시 데워 주고 싶어졌다.

천이백을 지날 때, 그가 접이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관창 안이 흰빛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흙이 유리가 되는 마지막 문턱이었다.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여기서부터는 불이 합니다.”

나는 담요를 여미고 벽돌에 등을 붙였다. 두 목이 살아 나올지, 어느 쪽이 공기를 가두고 있었는지, 이 밤이 끝나기 전에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온도계의 붉은 숫자만이, 흔들림 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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