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불
23화. 사유 없는 외출과 닫히지 않은 뚜껑
외출증은 반나절짜리였다.
접수대 간호사가 사유란을 비워 둔 걸 보고 볼펜 끝으로 톡톡 짚었다. 나는 그 칸을 채울 말을 고르지 못했다. 작품 완성이라고 적자니 손이 먼저 떨렸고, 유언이라고 적자니 이 사람이 웃을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쓰지 않고 서명란에만 이름을 눌러 넣었다. 간호사는 잠깐 나를 보다가 도장을 찍었다. 사유가 없는 외출을, 이 병원은 그래도 허가해 주었다.
환자복 위에 작업복을 걸치고 정문을 나섰다. 소매를 코앞에 대니 두 냄새가 같이 올라왔다. 팔뚝에는 아직 소독약이 남아 있었고, 어깨 쪽에는 마른 흙이 배어 있었다. 병원과 실기실이 한 벌의 옷 안에서 겹쳤다. 택시를 잡는 동안 왼손이 또 흔들렸다. 나는 그 손을 주머니에 넣지 않고 그냥 흔들리게 두었다. 이제는 감춰 봐야 감춰지지 않는 물건이었다.
실기실 문을 밀자 문 교수는 창가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일어나지도, 다가오지도 않았다. 그가 앉는 의자는 언제나 정해져 있었다. 연구실의 그 흰 항아리 앞에 놓여 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의자였다.
“왔습니까.”
낮게 던진 그 한마디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물레 옆으로 갔다. 뚜껑 위에 젖은 신문지가 한 겹 덮여 있었다. 조교가 사흘 밤 동안 물을 뿌려 준 그 신문지였다. 나는 신문지를 걷었다. 회색 표면이 드러났다. 갈라진 데 없이, 눌러 볼 것도 없이 손끝만 대도 알 만한 반건조. 조교가 몇 시에 물을 뿌렸을지, 밤새 몇 번이나 실기실에 들렀을지, 나는 잠깐 그 애의 손을 떠올렸다가 접었다. 지금 여기서 감사할 시간은 없었다.
굽칼을 쥐었다. 손잡이가 손바닥 안에서 미끄러졌다. 3차 이후로 이 떨림은 내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처럼 굴었다. 남의 손을 빌려 남의 관을 깎는 기분. 예전 같으면 이쯤에서 등 뒤가 뜨거워졌을 것이다. 그가 다가와 손을 겹쳐 왔을 테고, 물레가 한순간에 조용해졌을 테고, 나는 그 고요를 승인이라 부르며 받아먹었을 것이다. 지금 나는 그 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등 뒤의 온도를 재고 있는 나 자신이 느껴졌다. 그게 역겨워서 이를 악물었다.
“교수님.”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번엔 손대지 마세요.”
한참 말이 없었다. 나무 의자가 삐걱하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는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로 답했다.
“안 댑니다.”
승인도 아니고 거절도 아니었다. 그동안 그가 내게 준 문장들은 전부 나를 어딘가로 끌고 가려는 손잡이였는데, 이번 것에는 손잡이가 없었다. 처음으로 나를 혼자 두겠다는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이 등에 박히는 걸 느끼면서 물레를 밟았다.
판이 돌기 시작했다. 굽칼을 흙에 갖다 대자 회색 부스러기가 얇게 벗겨져 나왔다. 손이 떨렸다. 떨림을 억지로 붙잡으면 칼이 더 튀었다. 나는 붙잡기를 그만두고 흔들리는 대로 칼을 실었다. 손이 왼쪽으로 밀리면 칼도 왼쪽으로, 다시 돌아오면 칼도 돌아오게. 떨림에 리듬이 있었다. 나는 그 리듬에 몸을 맞췄다.
한 번 칼이 미끄러졌다. 굽 한쪽이 움푹 파였다. 예전이라면 물을 발라 메우고 다시 깎았을 자리였다. 나는 그 자국을 그대로 두었다. 파인 데를 손끝으로 한 번 쓸어 보고 손을 뗐다. 이건 문 교수의 지문이 박힌 어깨선과는 다른 자국이었다. 내 떨리는 손이 낸 것이고, 그러니 내 것이었다. 관에 남길 흠집을 고르는 일까지 남에게 넘길 수는 없었다.
굽을 다 깎고 뚜껑을 몸통 위로 옮겼다. 두 손으로 받쳐 천천히 내렸다. 목이 물리는 자리에서 손목의 떨림을 죽여야 했다. 나는 숨을 멈추고 뚜껑을 얹었다. 목과 목이 딱 맞물렸다. 헐겁지도, 뻑뻑하지도 않게.
“……맞네.”
의자에서 그 말이 흘러나왔다. 그 짧은 말에, 어깨선을 뭉갤 때 그의 눈을 스쳐 갔던 그 탁한 무언가가 다시 실려 있었다. 이십 년쯤 묵은 것. 그가 아내의 뚜껑을 끝내 얹지 못한 자리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 같기도 했다. 나는 그쪽을 보지 않았다.
뚜껑을 다시 들어 안쪽을 확인했다. 손톱자국 홈이 그대로 있었다. 성형할 때 안벽에 눌러 새긴 자리. 그 위로는 아무 손도 지나가지 않은 우묵한 어둠이 그대로였다. 조교의 물도, 문 교수의 지문도, 갤러리의 캡션도 여기까지는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홈을 손끝으로 한 번 읽고 뚜껑을 도로 덮었다.
덮은 뚜껑을 다시 반쯤 밀어 열어 두었다. 완전히 닫자니 아직 이르고, 열어 두자니 이유가 없었다. 완성인지 미완인지는 가마가 정할 것이었다. 초벌에서 갈라질지, 유약에서 무엇이 필까, 그건 1300도 안의 일이었다. 다만 이번만은 그 뚜껑을 얹은 게 그의 손이 아니라 내 떨리는 손이라는 사실만 남았다. 그거면 됐다.
작업대를 닦고 손을 씻었다. 손톱 밑 회색은 오늘도 안 빠졌다. 나는 젖은 손을 작업복에 문지르며 창가로 갔다.
“가마동은요.”
문 교수는 대답 대신 접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가마동 예약표였다. 11월 둘째 주에 그어져 있던 날짜가 지워지고, 그 위에 앞당긴 날짜가 적혀 있었다. 그의 필체였다. 내가 병상에서 두 달, 어쩌면 석 달이라고 세던 날들과, 그가 종이 위에 옮겨 적은 날들이 겹쳐 있었다. 처음으로 우리 둘의 셈이 같은 종이 위에서 만났다.
나는 예약표를 받아 작업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외출증도 거기 있었다. 사유를 비워 둔 종이와, 사유가 적힌 종이가 한 주머니에서 포개졌다. 병원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문 교수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가 물레 쪽으로 오는가 싶어 어깨가 굳었다. 하지만 그는 반쯤 열린 뚜껑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손을 등 뒤로 돌려 깍지를 꼈다. 만지지 않겠다는 자세였다. 그가 그 우묵한 어둠을 오래 들여다보는 동안, 나는 그의 눈이 지금 무엇을 세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내 관인지, 아니면 이십 년째 뚜껑을 얻지 못한 다른 그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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