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금
21화. 미지근한 캔커피와 안쪽의 홈
재인의 손이 도록을 넘기는 소리가 실기실을 채우다가, 어느 장에서 뚝 멎었다. 종이가 손끝에 붙들린 채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그애가 어느 페이지에서 멈췄는지 보지 않아도 알았다. 문학수·윤서리 공동작. 갤러리에서 온 시안의 캡션에 그렇게 박혀 있었다.
저녁 여섯 시였다. 창밖은 벌써 검게 내려앉았고, 천장의 형광등 하나가 몇 초에 한 번씩 숨을 골랐다. 나는 흙 묻은 앞치마를 벗지 않은 채 물레 앞에 앉아 있었다. 앞치마 앞섶에 마른 흙이 회색 딱지처럼 앉아 있었고, 앉을 때마다 그게 조금씩 부스러져 떨어졌다.
“그래도 전시는 해.”
내가 먼저 말했다. 재인이 물어보기 전에 답부터 내놓는 건, 그애의 입에서 나올 말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재인은 도록을 물레 판 위에 툭 내려놓았다. 반쯤 마른 유골함 옆이었다. 공동작이라는 활자가 판 위에서 위를 보고 누웠다.
“넌 지금 네 장례식을 그 인간한테 상납하는 거야.”
낮게, 그러나 또박또박이었다. 그애는 정곡을 찌를 때 목소리를 낮추는 버릇이 있었다. 큰 소리는 화가 났을 때, 낮은 소리는 진심일 때. 나는 반사적으로 계산부터 했다. 반박할 문장의 수, 그애가 물러설 확률, 우리가 이 밤을 넘기고 다시 웃을 수 있는 시간의 잔량. 화가 나야 할 자리에서 나는 또 셈을 하고 있었다. 그게 내 병이었다. 담도의 병 말고, 그 전부터 있던 병.
“값은 내가 정했어.” 나는 말했다. “팔리는 게 아니라 파는 거야.”
재인이 나를 봤다. 눈이 젖어 있었다. 그애는 울려고 할 때 먼저 웃어버리는 애였다. 지하 술집에서, 실기실에서, 나쁜 소식이 올 때마다 그애는 웃음으로 눈물을 앞질렀다. 그런데 이번엔 웃지 않았다. 입꼬리가 올라가려다 그냥 굳었다.
“서리야.”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실기실 바닥에 낮게 깔렸다.
“넌 그 인간이 네 손 잡고 어깨선 세워준 거, 그거 좋았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비 오던 밤, 젖은 흙 위에서 그의 지문과 내 지문이 경계를 잃던 순간을 재인이 봤을 리 없었다. 본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런데 그애는 보지 않고도 알았다. 나는 대답 대신 물레 판 위 도록의 모서리를 손끝으로 조금 밀었다. 그 침묵이 대답이라는 걸 나도 알았다.
“네가 파는 거라고 믿으면서, 실은 그 승인 한 번에 다 내주고 있잖아.”
그애가 가방끈을 어깨에 걸었다. 걸치는 동작이 평소보다 느렸다. 문 쪽으로 몸을 돌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를 한 번 더 봤다.
“난 네가 마지막까지 작품 말고 사람이었으면 했는데.”
문이 닫혔다. 오래된 철문이라 여닫을 때마다 아래틀이 바닥을 긁었고, 그 진동이 콘크리트를 타고 내 발끝까지 왔다. 나는 발바닥으로 그 떨림이 잦아드는 걸 끝까지 느꼈다. 복도를 걸어가는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도.
실기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형광등이 또 한 번 숨을 골랐다.
재인이 두고 간 캔커피가 물레 판 위에 그대로 있었다. 아까 들어올 때 편의점 봉지째 들고 와서 하나는 나한테 밀어주고 자기 것을 땄던 거였다. 나는 그애 몫이던 캔을 집었다. 미지근했다. 온기라고 부를 만한 것은 이미 빠져나가고, 상온의 미적지근함만 남아 있었다. 딴 자리에 입술 자국이 말라 있었다.
나는 캔을 쥔 채 남은 편을 셌다. 세는 게 내 병이니까 셌다. 엄마는 병을 알아버렸다. 화요일 새벽 첫차를 타고 올라와 걸레 밑 봉투를 뜯은 그날 이후로, 엄마는 이제 아무것도 모르던 엄마가 아니었다. 재인은 방금 문을 닫았다. 문 교수는 편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는 매입자였다. 그러니 남은 건 영이었다. 손가락을 접을 것도 없이 영.
손톱 밑에 회색이 박혀 있었다. 나는 그걸 손목 안쪽 여린 살에 눌러보았다. 마른 흙이 살갗에 잠깐 자국을 냈다가 이내 지워졌다. 이 고립은 계약서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은 조항이었다. 접힌 장을 펴지 않고 이름을 적었을 때, 나는 그 안에 뭐가 인쇄돼 있는지 모른 채로 그것까지 함께 산 거였다. 사는 사람은 원래 값을 다 알고 사지 않는다. 파는 사람이 값을 정하고, 사는 사람은 나중에 그 값을 마저 치른다. 오늘 치른 값이 재인이었다.
나는 캔을 내려놓고 유골함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반건조 상태의 어깨선이 형광등 밑에서 회색으로 눅눅하게 굳어가는 중이었다. 손끝으로 그 곡선을 훑었다. 그의 지문과 내 지문이 겹쳐 어디까지가 그의 손이고 어디부터가 내 손인지 알 수 없게 뭉개진 자리. 유려했다. 인정하기 싫어도 유려했다. 항암 뒤로 떨리는 이 손으로는 혼자서 결코 세우지 못했을 곡선이었다. 재인은 이걸 상납이라 불렀고, 그애의 말은 틀린 데가 없었다. 바깥은 팔았다.
나는 그릇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 우묵한 어둠 속에, 지난번 성형 때 안벽에 새겨둔 손톱자국이 그대로 있었다. 손끝이 그 홈을 더듬었다. 아무도 못 본 자리, 도록에도 없고 캡션에도 없고 계약서에도 없는 자리. 바깥에 누구 지문이 얹히든, 이 안쪽은 아직 내 것이었다. 그건 팔지 않았다. 팔 수도 없었다. 사려는 사람은 그릇의 겉만 보니까.
손을 뺐다. 그리고 남은 캔을 마저 비웠다. 미지근한 커피가 목을 넘어가는 동안, 나는 재인이 두고 간 도록을 집어 조용히 덮었다. 공동작이라는 네 글자가 표지 안쪽으로 접혀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됐다. 덮는 손이 뚜껑을 덮는 손과 닮아 있었다.
고립의 값은 이미 치렀다. 무를 수 없는 건 알았다. 무르지 않기로 한 게 나라는 것도 알았다. 다만 도록을 덮고 나서도, 미적지근하게 빈 캔이 물레 판 위에서 형광등을 받아 희미하게 빛나는 걸 나는 한참 동안 보고 있었다. 재인이 봉지째 사 온 커피가 두 개였는데, 이제 이 방에서 그걸 마실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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