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들어갈 그릇17화 / 전 32화6

3부 금

17화. 미지근한 캔과 없는 뚜껑

윤서리


재인이 나를 부른 건 다음 날 오후였다.

학교 뒤 편의점 파라솔은 다리 하나가 짧아서 팔꿈치를 얹으면 기울었다. 재인은 냉장고에서 캔커피 두 개를 집어 와 하나를 내 앞에 툭 놓았다. 캔 표면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나는 그걸 손끝으로 밀어 아래로 흘려보냈다.

“너 그 항아리 봤지.”

재인이 자기 캔을 따며 물었다.

“교수 연구실에. 뚜껑 없는 흰 거.”

봤다고 했다. 만지려다 혼났다고, 그것만 짧게 붙였다. 그날 노인의 눈이 어땠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캔의 고리에 손톱을 걸었다. 어제 어깨선을 뭉갤 때 파고든 회분이 손톱 밑에 아직 박혀 있어서, 은색 고리 위에 그 자국이 그대로 겹쳐 보였다.

재인은 캔을 한 모금 마시더니 굴리기 시작했다. 파라솔 다리가 짧은 쪽으로 캔이 자꾸 미끄러졌다. 재인이 그걸 손바닥으로 잡아 세웠다.

“조교들 사이에 이십 년 넘은 얘기가 돌아.”

목소리가 반쯤 내려앉았다.

“그거 사모님 유골함이래. 교수가 몸통만 빚고, 뚜껑을 끝내 못 만들었다는 거야. 이십 년 동안.”

나는 커피를 따지 않았다. 고리에서 손톱을 떼고, 캔의 이음새를 따라 손가락을 한 바퀴 돌렸다. 차가운 알루미늄이 손끝을 눌렀다.

“그럼 사모님은.”

“아직 납골당 임시함에 있대. 플라스틱 그거.”

재인이 웃으려다 실패했다. 입꼬리가 올라가다 멈추고, 대신 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얇은 알루미늄이 우그러지는 소리가 났다.

“미쳤지 진짜. 자기 마누라 뚜껑도 못 덮은 인간이, 네 관 어깨선은 손을 대?”

플라스틱 임시함. 나는 그 단어를 입안에서 한 번 굴려 보았다. 납골당 진열대 어딘가, 이름표 붙은 흰 플라스틱 원통 하나. 이십 년째 뚜껑 대신 규격품 마개를 물고 있는 여자.

화가 나야 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나는 또 셈을 하고 있었다. 어제, 내가 어깨선을 손바닥으로 눌러 뭉갤 때 노인의 눈을 스치던 탁한 것. 아까워하는 눈빛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십 년쯤 묵어 흐려진 무언가였다. 재인의 말이 그 정체에 뚜껑처럼 맞물렸다.

그는 내 그릇을 완성하려던 게 아니었다. 자기가 못 덮은 뚜껑을, 내 위에서 대신 덮어 보려던 거였다. 내 어깨선을 눌러 눕히던 그 손은 실은 이십 년 전 어느 어깨선을 더듬고 있었다.

“너 지금 표정 뭔데.”

재인이 눈을 좁혔다.

“설마 그 인간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아니야.”

나는 캔을 밀어 놓았다.

“그냥 뚜껑 생각했어.”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불쌍함은 아니었다. 속으로 다른 걸 세고 있었으니까. 남의 죽음에 뚜껑 하나 못 덮은 손이, 내 죽음은 왜 저렇게 서둘러 마감하려 드는가. 이십 년을 미룬 사람이, 나한테는 반건조 시간까지 지켜가며 어깨선을 눌러 놓았다. 미루지 못한 게 아니라, 미룰 시간이 없다는 걸 아는 거였다. 여섯 달. 그는 내 남은 개월 수를 자기 애도의 마감일로 바꿔 잡고 있었다.

재인이 캔을 다 비우고 일어섰다. 짧은 다리 쪽으로 파라솔이 다시 기울었다.

“서리야.”

캔을 손으로 완전히 찌그러뜨리며 재인이 나를 내려다봤다.

“넌 그 사람 실패한 항아리 두 번째 판이 되면 안 돼.”

정곡을 찌르고, 이번에는 먼저 웃지 않았다. 찌그러진 캔을 분리수거함에 던져 넣고 재인은 갔다. 나는 딴 적 없는 커피를 그대로 들고 한참 앉아 있었다. 캔은 어느새 미지근했다.

그날 밤 실기실로 돌아갔다.

형광등을 다 켜지 않고 작업대 위 조명만 내렸다. 어제 내가 무너뜨린 어깨선이 그 아래 웅크리고 있었다. 도로 뭉쳐 올려둔 흙덩이는 하룻밤 새 겉이 살짝 마르고 속은 여전히 눅눅해서, 손으로 짚으면 바깥은 서늘하고 안은 축축했다.

나는 그 앞에 앉아 오래 들여다보았다. 성한 벽 하나와, 어제 떨리는 손이 기울여 놓은 벽 하나. 무너뜨린 손과 세울 손이 같은 손인데, 하나는 말을 듣고 하나는 듣지 않았다.

문 교수의 흰 항아리를 떠올렸다. 뚜껑이 없어서 목이 늘 벌어져 있던 그것. 이십 년 먼지 아래, 아직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채 입을 벌리고 있던 여자의 자리. 그는 그 목에 얹을 원 하나를 이십 년 동안 못 그렸다. 손이 떨려서가 아니라, 덮는 순간 끝난다는 걸 견디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뚜껑을 덮는 건 인정하는 일이니까. 그 사람이 정말 안에 들어갔다는 걸.

나는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청바지 위에 얹은 손가락 그림자가 조명 아래서 조금씩 흔들렸다. 나는 그 손을 무릎 아래로 내려 감췄다. 감춰도 떨림은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그의 항아리에는 없는 뚜껑을, 내 것에는 반드시 내 손으로 덮겠다. 처음으로 그렇게 정했다. 어깨선을 다시 세우는 것도, 그 위에 얹을 뚜껑을 깎는 것도, 안벽에 남길 마지막 자국까지도. 대필은 없다. 두 번째 판도 없다.

문제는 손이었다. 흙은 젖고 마르기를 몇 번 반복해야 다시 어깨를 얻을 텐데, 그 사이에 내 손가락이 버텨 줄지는 아무도 계산해 주지 않았다. 나는 무너진 어깨를 손등으로 아주 가볍게 짚어 보았다. 눌러선 안 됐다. 지금 이 손으로 누르면 어제처럼 또 기울 테니까.

조명 아래서, 마르는 겉과 젖은 속이 서로 다른 시간으로 굳어 가는 흙을 나는 오래 지켜보았다. 어느 쪽이 먼저 준비될지, 흙인지 내 손인지, 밤이 다 가도록 답이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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