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들어갈 그릇16화 / 전 32화2

3부 금

16화. 유언의 대필과 무너진 어깨선

윤서리


새벽 여섯 시, 실기실 형광등이 두 번 깜빡이고 나서야 제대로 켜졌다. 나는 밤을 꼬박 새운 채 작업대 앞에 앉아 있었다. 어제저녁 문 교수가 눌러 눕혀 놓은 어깨선을 손끝으로 몇 번이고 되짚는 중이었다. 그의 지문이 박힌 자리는 내가 사흘을 붙잡고 있던 각보다 분명히 유려했다. 손끝이 나보다 먼저 그 사실을 알아챘다.

문이 열렸다. 커피 냄새가 흙 냄새 위에 얹혔다.

“이 시간에 나와 있을 줄 알았습니다.”

느리고 단정한 존댓말이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이 어깨, 손대셨죠.”

“반건조 시간이 넘어가고 있었어요. 그대로 두면 각이 죽습니다. 서리 씨 손으로는 그 각 못 잡아요. 화요일에 봤지 않습니까.”

화요일 오후가 목뒤로 지나갔다. 손으로 쌓아 올리던 기벽이 축을 잃고 한쪽으로 주저앉던 순간. 그 전에 도면을 콩테로 그을 때 종이 위에서 사각거리던 소리. 그 소리마저 고르지 못했다. 선이 두 번 겹쳐 그어졌으니까. 옆을 지나던 그가 내 떨리는 오른손을 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는 게 그의 방식이었다. 그 침묵을 오늘 이렇게 꺼내 무기로 쓸 줄은 몰랐다. 막상 들으니 명치가 뜨거워졌다.

“이건 제 관입니다.”

나는 낮게 끊어 말했다.

흙은 젖어 있는 동안 자기를 만진 손을 전부 외운다고, 그는 언젠가 물레 앞에서 말했었다. 마르고 나면 지운 자국까지 속에 남는다고. 그때는 도예과 특유의 허풍쯤으로 흘려들었는데, 여섯 시의 어깨선 위에서 그 문장은 협박처럼 정확했다. 그의 지문은 흙 속으로 이미 반쯤 들어가 있었다. 내가 아무리 그 위에 손을 겹쳐도, 흙은 처음 자기를 눕힌 손을 기억할 참이었다.

나는 그 유려한 곡선을 오래 내려다봤다. 인정하기 싫은데 손이 먼저 인정하고 있었다. 내가 사흘 밤을 씨름한 각보다, 그가 지나가며 눌러 놓은 각이 그릇에 가까웠다. 팔릴 물건. 더 비싸게, 더 완성되어. 그리고 내 이름 옆에 그의 지문이 영원히 굳어 붙는 물건.

“화요일 얘기, 자꾸 꺼내지 마세요.”

내가 말하자 그는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흙물이 천에 회색으로 번졌다. 손을 다 닦은 뒤에도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커피 잔을 작업대 끝에 내려놓는 소리만 났다.

“서리 씨.”

그가 처음으로 반말을 놓았다. 존댓말의 마디가 풀리자 목소리가 한 뼘 낮아졌다.

“네 죽음은 네 것이야. 그건 나도 못 가져가고, 갤러리도 못 가져가. 아무도 못 가져가. 그런데 흙은 달라. 그릇은 굽고 나면 만든 사람 것이 아니야. 가마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그건 보는 사람 거고, 사는 사람 거고, 오래 남으면 아무도 아닌 것의 것이 되는 거야. 나는 지금 그 순서를 앞당겨 주는 거고.”

그는 흙 얘기를 할 때만 문장이 길어지는 사람이었다. 그 긴 문장이 무서웠다. 옳아서 무서웠고, 옳은 말이 내 그릇을 더 낫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더 무서웠다. 승인 욕구와 자존이 내 안에서 처음으로 정면으로 부딪혔다. 그가 눌러 준 그 각을 그대로 두면, 나는 더 잘 만든 관에 들어가게 된다. 그것도 그가 절반쯤 만든 관에.

명치가 뜨거워졌다. 나는 그 열이 어디서 오는지 셈해 보려다 그만뒀다. 셈이 끝나기 전에 손이 먼저 움직일 것 같았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밤샘한 다리가 잠깐 휘청했다. 작업대를 짚고 몸을 세우자 무너뜨려야 할 어깨선과 내 얼굴 사이가 한 뼘으로 좁혀졌다. 오른손이 저절로 그 위로 올라갔다. 손바닥과 흙 사이에 아직 공기 한 겹이 남아 있었다. 그 공기 안에서 나는 마지막으로 망설였다. 이걸 뭉개면 그의 각도 사라지지만 내가 사흘 매달린 각도 함께 사라진다. 오늘부터 다시 처음부터 쌓아야 한다. 그럴 밤이 내게 몇 개나 남았는지는 아무도 계산해 주지 않았다.

“제목이 좋다고 했죠. 유언.”

내가 말했다. 그가 나를 봤다.

“근데 유언은 대필이 안 됩니다.”

나는 그의 눈을 정면으로 본 채, 반건조된 어깨선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그리고 천천히 눌렀다. 흙은 미지근했다. 겉은 말라 서걱거리는데 속은 아직 물기를 품고 있어서, 손바닥 밑에서 두 겹의 감촉이 따로 놀았다. 유려하던 곡선이 소리 없이 주저앉았다. 무너진 흙이 손금 사이로 밀려 올라와 손가락 틈에 끼었다. 그의 지문이 내 지문 밑에서 뭉개지는 감각이 손바닥 전체로 퍼졌다. 내가 지운 게 그의 손자국인지 내 그릇인지, 그 경계가 손 안에서 함께 무너졌다.

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었다. 명령을 질문처럼 던지던 입매가 잠시 갈 곳을 잃었다.

“지금 뭘 한 건지 압니까.”

그가 다시 존댓말로 돌아왔다. 반말을 거둬들이는 속도가 빨랐다.

“압니다.”

나는 손바닥을 어깨선에서 뗐다. 흙이 손에 묻어 올라왔다.

“제 서는 자리를 제 손으로 깎은 거예요.”

그는 무너진 어깨를 내려다봤다. 조금 전까지 그의 손이 완성해 놓았던 곡선이, 이제는 그냥 짓눌린 회색 덩어리였다. 그의 시선이 그 위에서 오래 머물렀다. 나는 그가 아까울 거라고 생각했다. 자기 손이 만든 최선의 각이 사라졌으니까. 그런데 그의 눈에 스친 건 아까움만이 아니었다. 뭔가 더 오래된 것, 이십 년쯤 묵어 탁해진 무엇이 잠깐 지나갔다. 나는 그게 뭔지 모른 채로 봤고, 봤다는 것만 기억에 새겼다.

손을 내려다봤다. 손바닥 가득 흙이 묻어 있었다. 그 회색 사이로, 손톱 밑에 며칠째 씻어내지 않고 둔 흙이 보였다. 유골함 안벽을 손톱으로 눌러 파낼 때 파고들었던 그 흙. 방금 무너뜨린 어깨선의 흙과 같은 색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같은 반죽에서 안과 밖을 나눠 올렸으니까. 그런데도 그걸 눈으로 확인하는 건 처음이었다. 안쪽의 흙과 바깥쪽의 흙이 내 손 안에서 처음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내가 지킨다고 했던 안과, 그가 가져간다고 했던 밖이, 손금 위에서 구별되지 않았다.

“다시 세울 수 있겠습니까.”

그가 물었다. 이번엔 정말로 질문이었다. 명령이 아니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을 폈다 오므렸다. 미세한 떨림이 아직 손끝에 있었다. 항암 3차 뒤로 사라지지 않은 떨림. 방금 어깨선 하나 뭉개는 데는 그 떨림이 아무 방해도 되지 않았다. 무너뜨리는 데는 힘도 정확도도 필요 없으니까. 문제는 다시 올리는 쪽이었다. 무너진 곳을 원래 두께로, 원래 각으로, 흔들리지 않게 다시 세우는 일. 그 일에 필요한 손이 지금 내게 남아 있는지, 앞으로 며칠이나 남을지.

나는 작업대에 남은 흙 한 덩이를 집어 손바닥 위에서 굴렸다. 엄지로 가운데를 눌러 우묵하게 팠다. 벽을 끌어올리려 하자 손끝이 다시 잘게 떨렸고, 한쪽 벽이 종잇장처럼 얇아지며 기울었다. 무너뜨리는 손과 세우는 손은 같은 손인데, 하나는 멀쩡하고 하나는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그 흙덩이를 도로 뭉쳐 작업대 위에 내려놓았다. 문 교수는 그 손을 봤다. 그도 방금 무엇을 봤는지 알았을 것이다. 화요일에 봤던 것과 같은 떨림이었으니까. 그는 이번엔 그걸 무기로 꺼내지 않았다. 커피 잔을 들고, 무너진 어깨를 한 번 더 내려다본 뒤, 아무 말 없이 문 쪽으로 돌아섰다.

형광등이 다시 한 번 깜빡였다. 나는 무너진 어깨를 손끝으로 짚어 보며, 이 자리를 혼자 세우는 데 흙이 몇 번 더 마르고 젖어야 하는지를 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젖고 마르는 시간 안에 내 손이 버텨 줄지를, 그 옆에 나란히 세웠다. 어느 쪽 숫자가 먼저 바닥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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