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손자국
14화. 접힌 면의 무게
“커피 드릴까요.”
큐레이터가 종이컵을 반쯤 들어 보이며 물었다. 나는 됐다고 했다. 회의실은 인터뷰하던 날보다 좁아 보였다. 같은 방인데 그날은 녹음기 하나가 정적을 세고 있었고, 오늘은 서류 뭉치 두 부가 테이블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문 교수는 내 옆이 아니라 맞은편에 앉았다. 자기 몫의 서류에 벌써 펜을 대고 있었고, 종이 넘기는 소리가 규칙적이었다.
“천천히 보십시오. 급할 것 없습니다.”
그가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급할 것 없다는 말이 우스웠다. 나한테 남은 게 급한 것뿐인데. 나는 표지를 손끝으로 훑었다. 유언, 문학수, 윤서리. 세로로 박힌 세 덩어리를 그 순서대로 만졌다. 표지 종이는 매끈하고 두꺼웠고,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첫 장을 넘겼다. 내 이름 옆에 괄호가 열려 있었다. 그 안에 적힌 두 글자를 나는 오래 봤다. 학생이 아니었다. 그가 갤러리에 메일로 요구했던 대로, 지워진 자리에 다른 것이 앉아 있었다. 나는 그 두 글자가 잉크인지 도장인지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손톱으로 눌러봤다. 눌러도 번지지 않았다. 이미 인쇄되어 있었다.
배분 비율이 적힌 장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숫자는 소수점 아래까지 정직했다. 나는 그 숫자를 두 번 읽었다. 한 번은 눈으로, 한 번은 안쪽으로. 안지름 십육 센티의 우묵한 속이 이 숫자대로 나뉘는구나, 하고 셈했다. 내 여섯 달을 부피로 환산하면 대략 삼 리터, 그걸 다시 이 비율로 자르면 몇 리터가 저쪽으로 넘어가는지. 화장 후의 부피를 계산하던 밤과 똑같은 손놀림으로 나는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고도 답을 냈다. 분노가 올라올 자리에 숫자가 먼저 앉았다. 분노는 느리고 숫자는 빨랐다.
팔리는 게 아니라 파는 거다.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되뇌면 이 방에서 내가 조금 위에 있는 것 같았다. 맞은편에서 펜을 놀리는 예순셋의 남자도 나보다 아래에 있었고, 종이컵을 든 채 내 대답을 기다리는 큐레이터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반 뼘쯤 높은 곳에서 이 거래를 내려다보는 사람이었다. 실제로는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는 셋 중에 가장 급한 게 나였다. 그래도 되뇌었다.
펜은 갤러리 로고가 박힌 검은 볼펜이었다. 서명란에 이름을 적으려고 촉을 대는데 잉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종이 귀퉁이에 두어 번 그었다. 잉크가 걸린 자리에서 하얗게 긁힌 선이 나오다가, 세 번째에야 검은 줄이 터졌다. 손가락 마디를 내려다봤다. 손톱 밑에 회색이 아직 박혀 있었다. 어제 관 안쪽을 매만지다 들어간 흙, 씻어내지 않은 그것. 검은 펜을 쥔 손가락 끝에서 그 회색만 이 계약서에 없는 색이었다. 표지에도 없고 배분표에도 없고 괄호 안 두 글자에도 없는, 나만 데리고 온 색. 나는 그 생각을 조금 오래 붙들었다. 그것으로 무언가를 지키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이름을 적으려고 마지막 장을 확인하는데, 그 장이 반쯤 접혀 넘어가 있었다. 상단에 인쇄된 조항 제목이 접힌 선 위로 반만 보였다. 공동제작자. 나는 그 글자를 봤고, 접힌 면 안쪽에 이어질 문장을 보지 않았다. 손을 대면 펴질 것이었다. 펴면 읽어야 하고, 읽으면 되물어야 하고, 되물으면 방금 내가 만든 반 뼘의 높이가 무너질 것 같았다. 그가 종이에서 눈을 들 것이고, 큐레이터가 종이컵을 내려놓을 것이고, 나는 다시 급한 사람이 될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접힌 장을 펴지 않았다. 접힌 채로 서명란만 찾아 이름을 적었다. 윤서리. 세 글자를 적는 동안 촉이 종이에 걸리는 감촉이 손목까지 올라왔다. 굽을 깎을 때 칼이 흙에 걸리던 감촉과 비슷했다. 다 적고 펜을 내려놓았다.
문 교수가 자기 서명을 끝내고 펜을 내려놓으며 나를 봤다.
“그 이름, 잘 쓰셨습니다.”
칭찬인지 확인인지 나는 분간하지 못했다. 잘 썼다는 게 글씨가 반듯했다는 뜻인지, 옳은 자리에 옳게 넣었다는 뜻인지. 나는 그 문장을 앞뒤로 뒤집어봤지만 어느 쪽으로도 딱 맞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흙을 볼 때와 사람을 볼 때가 늘 같았고, 지금도 같았다.
큐레이터가 서류를 두 부로 나눠 한 부를 내 쪽으로 밀었다. 그러면서 물었다.
“오프닝 날 저녁에요, 조명 아래 잠깐만 서 주실 수 있으세요. 인사말은 안 하셔도 되고, 서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서 있기만 하면 된다는 말을, 나는 서랍 맨 위 칸의 초벌 기다리는 몸통을 떠올리며 들었다. 그 말 어디에도 진열대라는 단어는 없었지만, 없는 단어가 오히려 또렷했다. 나는 대답 대신 엄지로 손톱 밑을 눌렀고 회색이 그 아래에서 뭉개졌다. 큐레이터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급할 것 없다고, 이번에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왔다. 이층에서 일층까지 열여덟 칸, 내려오는 동안 뚜껑 없는 흰 항아리가 떠올랐다. 이십 년째 그의 연구실 구석에서 뚜껑을 기다리는 그것. 나는 방금 내 뚜껑을 남의 손에 쥐여 준 걸까, 아니면 처음으로 내가 그걸 쥔 걸까. 손가방에는 내 몫의 서류 한 부가 들어 있었고, 그 안에 접힌 장이 접힌 채로 들어 있었다.
답은 그 접힌 면 안에 인쇄되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펴지 않기로 했다. 아직은.
유리문을 밀고 나오자 종로의 소음이 한꺼번에 들이쳤다. 나는 손톱 밑 회색을 한 번 더 눌러보고, 서류가 든 가방을 어깨에 고쳐 멨다. 가방이 생각보다 가벼웠다. 접힌 장 하나쯤은 무게가 없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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