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런웨이의 끝
8화. 붉은 인주가 묻은 열쇠
“여기, 여기, 그리고 뒷장 연대보증란까지 자필로 부탁드립니다.”
담당자가 볼펜을 돌려 손잡이를 내 쪽으로 밀었다. 나는 그것을 받았다. 창구 의자는 이상하게 낮아서, 앉으면 무릎이 어색하게 접혔다. 마흔한 살 먹은 사내가 아이용 의자에 앉은 꼴이었다. 서류는 세 장씩 묶여 있었고, 형광펜으로 그은 노란 줄이 첫 장부터 뒷장까지 이어졌다. 줄은 서명란에서 끝나지 않고 그 아래 작은 칸까지 흘러갔다.
채무자 레이어드 주식회사. 연대보증인 서지운.
두 줄 사이에는 아무 여백도 없었다. 회사와 나를 갈라놓던 선이 이 종이 한 장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회사가 지면 내가 진다. 그동안 나는 그 둘을 같은 것이라 여겨왔으면서도, 막상 활자로 나란히 박힌 걸 보니 목 안쪽이 마른 느낌이 들었다.
첫 칸에 이름을 적었다. 손에 힘이 들어가 글씨가 평소보다 크게 번졌다. 서, 하고 첫 획을 긋는데 잉크가 종이에 살짝 뭉쳤다.
“괜찮으세요?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담당자가 말했다.
“네. 몇 달만 돌리면 되는 자금이라.”
나는 웃어 보였다. 그런데 그 웃음이 얼굴 어디에도 붙지 않았다. 입꼬리만 잠깐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연대보증란 위에서 손이 멈췄다. 4억. 운영자금이라는데 서류의 어법은 달랐다. 대출, 채무, 보증, 구상권. 나는 그 단어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안다고 생각했고, 실은 모른다는 걸 지금 알았다. 펜이 무거웠다. 잉크가 아니라 다른 게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손목까지 그 무게가 올라왔다.
멈춘 손끝에 오래된 저녁 하나가 딸려 올라왔다. 1998년, 아버지가 도장을 눌렀다던 종이. 삼촌 대신 서줬다던 그 보증. 나는 그 종이를 본 적이 없었다. 본 건 그 뒤의 아버지뿐이었다. 나는 눈을 한 번 감았다 뜨고, 그 저녁을 밀어냈다. 이름 석 자를 눌러 적었다. 도장을 꺼내 인주에 굴리고, 연대보증인 서지운 옆에 붉게 찍었다.
“축하드립니다. 좋게 잘 풀리실 거예요.”
담당자가 서류를 챙기며 말했다. 나는 그 축하가 어디에 붙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대출이 나온 걸 축하한다는 건지, 회사가 살아난다는 건지. 붉은 도장 자국은 아직 젖어 있었다.
은행을 나와 나는 사무실로 바로 가지 않았다. 성수동까지 돌아가는 길이 오늘따라 멀게 느껴졌다. 대신 은행 두 블록 옆 카페에 들어가 창가에 앉았다. 커피를 시켜놓고 나는 정 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됐어요, 4억. 이걸로 두 달 반은 더 벌어요.”
내 목소리는 밝았다. 나는 그 밝음이 필요했다. 목소리라도 밝지 않으면 오늘 서명한 손이 다시 무거워질 것 같았다.
정 이사는 잠깐 말이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사무실 소음이 얕게 깔렸다.
“대표님, 그거 개인 보증으로 들어간 거죠.”
물음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회사가 못 갚을 일은 없어요. 브리지 하나만 살아도 다 정리돼요.”
“대표님, 그 돈은 회사 런웨이가 아니라 대표님 인생 런웨이예요.”
나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정 이사답지 않은 문장이었다. 그는 늘 표를 먼저 보고 사람은 나중에 보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인생이라는 단어를 썼다.
“계산은 제가 해요.”
나는 잘랐다. 전화를 끊고 화면을 내려다보니 부재중 전화 한 통이 떠 있었다. 민혁이었다. 시간은 오전, 내가 은행 의자에 앉아 있던 무렵이었다. 문자는 없었다. 그는 용건이 있으면 문자를 남기는 사람이었다. 남기지 않았다는 건, 목소리로 할 말이었다는 뜻이었다. 나는 통화 목록을 오래 들여다보다가 화면을 껐다. 걸지 않았다.
그날 밤 관악구 집.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대출 계약서 사본을 무릎 위에 펼쳐 놓았다. 거실 불은 켜두었다. 요즘 나는 불부터 켰다. 어둠 속에 혼자 앉는 습관을 나는 얼마 전부터 무서워하기 시작했다.
연대보증인 서지운. 그 여섯 글자가 종이 위에서 다른 활자들보다 진하게 떠올랐다. 내가 눌러 쓴 자국 탓이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 위를 한 번 문질러 보았다. 잉크는 이미 말라 있었다.
방문이 반쯤 열렸다.
“무슨 서류야?”
은수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종이를 뒤집었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회사 대출. 별거 아니야.”
“당신 이름으로 서명한 거야, 회사 이름으로?”
은수의 질문은 조용했고 정확했다. 언제나 그랬다. 그는 큰 소리를 낸 적이 없는데도, 그가 던진 문장은 늘 내가 덮으려던 자리를 골라 짚었다.
“몇 달만 버티면 돼.”
나는 대답 대신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은 은수를 향한 게 아니었다. 은행 의자에서부터, 카페에서부터, 나는 하루 종일 나 자신에게만 그 문장을 반복하고 있었다.
은수는 문틀에 손을 얹은 채 잠시 나를 보았다.
“그 몇 달이 지나면 뭐가 남아?”
그러고는 문을 닫았다. 방 안의 공기가 한 겹 낮아졌다.
나는 뒤집어 놓은 종이를 다시 넘기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에서 첫 사무실 지하실 열쇠를 꺼냈다. 손바닥 한가운데 놓고 다른 손으로 덮어 꼭 쥐었다. 오늘 나는 4억을 손에 넣었다. 통장에 숫자가 찍히면 몸도 어딘가 데워질 줄 알았다.
열쇠는 그렇지 않았다. 오래 쥐고 있어도 손바닥의 온기가 그 안으로 새어들지 않았다. 나는 손을 폈다. 열쇠 밑동에 붉은 인주가 조금 묻어 있었다. 낮에 도장을 찍을 때 손끝에 남은 것이 옮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것을 엄지로 문질러 지우려다가, 그대로 두었다.
거실 불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 옆방에서 은수가 뒤척이는 소리가 한 번 났다가, 그쳤다.
이 화의 별점·후기
아직 후기가 없어요. 첫 후기를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