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원의 아침5화 / 전 33화2

1부 유리의 도시

5화. 식은 파스타와 차가운 열쇠

서지운


예약은 은수가 했다.

청담동 골목 안쪽 이탈리안, 창가 두 사람 자리. 나는 안내받아 앉고 나서야 이 테이블을 알아봤다. 팔 년 전, 아직 회사도 밸류에이션도 없던 시절, 내가 두 시간을 서성이다 겨우 예약을 잡았던 자리. 그때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만 봐도 웃음이 났었다. 지금은 그 창밖으로 대리기사들이 휴대폰 불빛에 얼굴을 밝힌 채 서 있는 게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은수는 남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귀에는 결혼 전 내가 사준 진주 귀걸이가 걸려 있었다. 알이 작아서 조명 아래서만 겨우 빛나는, 그때 내 통장으로 살 수 있던 최선의 것.

“여기 리조또 기억나?”

은수가 물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리조또가 기억나지 않았다. 대신 그때의 나를 떠올려보려 했다. 아직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했지만 은수 앞에서 초조하지 않던 남자. 그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건 여의도로 보낸 자료의 페이지 수와 아직 답이 없는 브리지 미팅 세 건이었다.

전채가 나오기도 전에 휴대폰이 울렸다. 심사역 번호였다. 나는 냅킨을 접시 옆에 내려놓았다.

“잠깐만.”

밖으로 나갔다. 통화는 별것 아니었다. IR 자료의 코호트 지표 시트를 다시 보내달라는 요청. 삼 분이면 끝날 말이었는데 나는 오 분을 서 있었다. 통화가 끝나고도 화면을 들여다보며, 이 전화가 혹시 우리 쪽에 관심이 남아 있다는 신호는 아닐까 헤아렸다. 자리로 돌아오니 은수는 물잔만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전채는 그대로였다. 나를 기다린 모양이었다.

메인이 나올 때 다시 울렸다. 같은 번호였다. 나는 화면을 보고 잠시 포크를 든 채 망설였다.

“미안.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야.”

은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 옆얼굴을 한 번 보고 일어섰다.

두 번째 통화는 더 짧았다. 시트를 확인했다는 말, 다음 주에 다시 보자는 말. 그게 다였다. 그런데도 나는 전화기를 귀에서 뗀 뒤에도 한참을 서 있었다. 유리문 안쪽으로 은수가 보였다. 파스타를 한 입도 대지 않은 채 포크로 면을 몇 바퀴 돌렸다가 다시 풀었다. 감았다 푸는 동작이 두 번, 세 번 반복됐다. 나는 그 손을 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다음 주 미팅 자리에 누가 나올지, 시트의 어느 숫자를 먼저 짚어야 할지 순서를 매기고 있었다. 그 계산이 끝나기 전에는 안으로 들어갈 마음이 서지 않았다.

돌아왔을 때 파스타는 식어 굳어 있었다. 오일이 접시 가장자리에 하얗게 엉겨 있었다. 은수가 포크를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금속이 사기에 닿는 소리가 짧게 났다. 은수는 그 포크를 다시 집지 않았다. 두 손을 무릎으로 내리고 나를 오래 봤다.

“당신 통장 말고 당신을 본 게 언제더라.”

나는 웃으려다 실패했다. 대신 준비해둔 말을 꺼냈다.

“상장하면 다 보상할게. 진짜야. 이런 시간, 몇 배로 돌려줄게. 지금은 그걸 벌어오는 중이야.”

은수가 접시를 조금 밀었다.

“보상? 오늘이 무슨 예산 항목이야?”

그 말이 어딘가를 긁고 지나갔다. 나는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속으로 계산했다. 브리지가 마감되고 시리즈B가 들어오면, 상장까지 가면, 그때는 은수 옆에만 있겠다고. 오늘 이 저녁은 미래를 담보로 잠깐 빌려 쓰는 시간일 뿐이라고. 식은 파스타 한 접시와 대기 중인 미팅 세 건을 저울에 올려두고, 나는 아직은 미팅 쪽이 무겁다고 셈을 맞췄다. 그렇게 은수를 나중에 정산할 항목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후식은 시키지 않았는데 티라미수가 나왔다. 위에 초 하나가 꽂혀 있었다. 결혼기념일이라고 예약할 때 은수가 말해둔 모양이었다. 종업원이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물러갔다. 작은 불꽃이 두 사람 사이에서 흔들렸다.

“그 미래는 언제 와?”

은수가 조용히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 대신 몸을 숙여 초를 껐다. 연기가 가늘게 피어올라 우리 사이에서 잠깐 머물다 사라졌다. 은수가 그 연기를 눈으로 따라갔다. 나는 그 눈을 보지 않으려고 계산서를 달라는 손짓을 했다.

계산은 내 카드로 했다. 단말기에 카드를 꽂자 승인 문자가 곧바로 떴다. 회사 통장이 아니라 내 개인 통장이었다. 숫자 하나가 빠져나가는 걸 보면서 나는 이상하게 안심했다. 아직은 이런 저녁 하나쯤 문제없이 결제되는 잔고가 있었으니까. 그날은 그게 나를 지탱하는 유일한 문장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은수는 창에 머리를 기댔다. 계기판 불빛만 두 사람 얼굴을 파랗게 비췄다. 신호에 걸려 차가 설 때마다 엔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다음 주에 미팅이 하나 있어. 이번엔 좀 다를 것 같아.”

내가 말했다. 은수는 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저번에도 그랬잖아.”

“이번엔 진짜야.”

“그 말도 저번에 했어.”

은수의 목소리에는 화도 없었다. 화가 나면 오히려 나았을 것이다. 은수는 지친 사람의 톤으로 그냥 사실을 짚었다. 나는 다음 말을 찾다가 그만두었다. 여기서 미팅 얘기를 더 하면 은수가 또 무슨 항목이냐고 물을 것 같았다. 차 안에는 방향제 냄새와 은수의 향수 냄새만 남았다. 남은 길 내내 우리는 말이 없었다.

그날 밤 은수는 먼저 잠들었다. 나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어둠에 눈이 익기를 기다렸다. 은수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나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첫 사무실 열쇠를 쥐었다. 쇠는 차가웠다. 손안에서 한참을 쥐고 있어도 온기가 옮겨가지 않았다.

나는 그 차가움을 곧 지나갈 것으로 여겼다. 미팅이 성사되고 통장에 숫자가 채워지면, 그때는 이 열쇠도 이 침실도 은수의 잠든 등도 전부 데워질 거라고. 지금은 겨울이고, 겨울은 원래 이렇게 차가운 거라고.

은수가 잠결에 몸을 뒤척여 내게서 조금 멀어졌다. 나는 그 거리를 눈으로만 재고, 열쇠를 도로 주머니 깊이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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