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원의 아침4화 / 전 33화2

1부 유리의 도시

4화. 화살촉을 그리지 못한 곡선

서지운


일곱 번째 거절 메일은 화요일 오후 세 시에 왔다.

발신자 이름은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문장은 낯익었다. 시장 상황을 고려할 때 이번 라운드는 함께하기 어렵겠습니다. 여의도 그 심사역이 노트북을 닫으며 남긴 침묵을 활자로 옮기면 이런 모양이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한 줄을 세 번 읽었다.

유리벽 밖의 성수동 하늘은 맑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아서 오히려 남의 도시 같았다. 유리에 내 얼굴이 흐릿하게 겹쳐 있었다. 그날 아침 포털 메인에는 후속 라운드 절반이 좌초했다는 기사가 걸려 있었다. 나는 그 기사를 읽지 않고 닫았다. 대신 스프레드시트를 열었다.

브리지 미팅 열두 개. 답이 없거나 무기한 미뤄진 아홉 개에 붉은 표시를 했다. 손가락이 셀 위를 지날 때마다 화면 한쪽 구석이 붉어졌다. 남은 세 개는 흰 채로 두었다. 이건 아직 살아 있다. 나는 그 흰 칸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하나만 터지면 다 뒤집힌다. 런웨이는 이제 넉 달이었다. 넉 달이면 충분하다고 나는 세 번쯤 소리 내지 않고 말했다.

저녁에 민혁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그는 노트북을 들고 오지 않았다. 십오 년을 봐 온 사람이 노트북 없이 회의실에 들어서는 건, 계산이 아니라 결론을 가지고 왔다는 뜻이었다. 그가 A4 한 장을 테이블 위로 밀어 놓았다.

“열한 명 중에 여섯.”

종이 위에는 이름이 있었다. 이름 옆에는 근속 개월 수가 적혀 있었다. 54, 41, 38, 12. 누군가는 삼 년을 넘겼고 누군가는 이제 겨우 겨울을 한 번 났다.

“채용 계약 세 건은 아직 취소 가능해. 위약금 물어도 지금 자르는 게 싸. 마케팅은 삼분의 일로 줄이고.”

“속도를 늦추자는 거야?”

“멈추자는 거야. 지금 멈추면 살아. 이대로 가면 12월에 잔고가 0이야.”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나는 그가 화가 나면 목소리가 낮아진다는 걸 알았다. 십오 년 동안 알았다. 그런데 그 순간에는 모른 척했다.

나는 명단을 손끝으로 밀어냈다. 종이가 테이블 위를 조금 미끄러졌다.

“이게 네가 밤새 짠 로직이야? 사람을 자르면서 성장한 회사 봤어? 이건 겁쟁이가 쓰는 엑셀이야.”

말이 입 밖으로 나온 순간, 나는 그 문장의 결이 어디서 왔는지 알아챘다. 1998년, 삼촌이 우리 집 장롱을 트럭에 싣고 나가면서 아버지한테 하던 말투. 배포가 없어서 이 지경이 된 거라고, 사내가 겁이 많아서라고. 어린 나는 그 말을 방문 뒤에서 들었다. 그 말투가 지금 내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브리지 세 개 살아 있어. 하나만 붙으면 이 명단은 없던 일이 돼. 지금 여섯 명 자르면 소문 나. 소문 나면 그 세 개도 죽어. 그럼 여섯이 아니라 스무 명이 다 죽는 거야.”

민혁은 대답하지 않고 나를 봤다. 오래 봤다. 그러고는 밀려났던 A4를 다시 내 쪽으로 돌려놓았다.

“에러를 안 고치면 로그가 쌓여. 처음엔 그냥 경고야. 무시할 수 있어. 그런데 안 고치면 로그가 불어나서, 나중엔 그게 시스템을 통째로 잡아먹어. 지금 이 숫자들이 그 로그야.”

“그래서 사람을 지우자고.”

“나는 12월을 보고 있어. 너는 세 개의 기적을 보고 있고.” 그가 종이 위 이름들을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 “우리 회사 만들고 처음이다. 같은 화면을 안 보는 게.”

나는 그 종이를 뒤집어 놓았다. 이름이 사라지고 흰 뒷면만 남았다. 그의 등 뒤 화이트보드에는 지난주에 그리다 만 곡선이 있었다. 우상향으로 치솟다가 마커의 잉크가 끊겨 화살촉을 못 그린 채 멈춘 선. 나는 그걸 보지 않으려고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창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저녁이라 유리에는 회의실 조명과 뒤집힌 A4, 그리고 마주 앉은 우리 둘만 비쳤다.

민혁은 종이를 그대로 두고 나갔다. 가져가지도, 다시 뒤집지도 않았다. 나는 그 흰 뒷면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서랍에 넣었다.

집에 왔을 때 거실은 어두웠다.

손이 스위치로 갔다. 지난번처럼 다 켜버리고 싶었다. 거실등, 주방등, 복도등까지 전부. 그런데 그날은 켜지 않았다. 어둠 속에 그냥 앉아 봤다. 눈이 어둠에 익자 소파의 윤곽, 식탁의 모서리, 베란다 창으로 들어오는 옆 동의 불빛이 하나씩 떠올랐다. 아버지의 굽은 등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이번엔 내가 그 자세로 앉아 있었다. 무릎에 팔꿈치를 얹고 등을 말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지하실 열쇠가 손끝에 닿았다. 종일 몸에 붙어 있던 쇠붙이인데도 차가웠다. 손바닥 안에 넣고 쥐었다. 세게 쥐면 데워질 것 같아서 더 세게 쥐었다. 열쇠는 데워지지 않았다.

방문 틈으로 스탠드 불빛이 새어 나왔다. 그 틈이 조금 벌어졌다.

“오늘은 왜 불을 안 켜?”

은수의 목소리였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게 아니라, 입을 열면 회의실에서 뱉은 그 삼촌의 말투가 또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열쇠만 더 세게 쥐었다.

문틈이 잠시 그대로 있다가 도로 좁아졌다. 스탠드 불빛도 좁아졌다.

넉 달이라고 나는 다시 세지 않고 생각했다. 회사도 넉 달, 이 열쇠도, 이 집도. 무언가의 온도가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그게 바깥에서 부는 혹한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다. 손안의 쇠붙이가 아무리 쥐어도 미지근해지지 않는 이유가, 내 손이 이미 차가워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건, 그때는 인정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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