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유리의 도시
3화. 형광등 아래의 빈칸
유리벽 너머로 오후 세 시의 한강이 납작하게 누워 있었다. 회의실 안에서는 정 이사가 다음 라운드 지표 초안을 띄워놓고 유리와 뭔가를 조율하는 중이었다. 그때 책상 위 휴대폰이 울었다. 화면에 엄마, 두 글자가 떴다.
나는 회의실 유리문을 밀고 나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 안쪽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방음이 잘 되는 벽이었다. 그 벽을 세우는 데 든 견적을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어, 엄마.”
“지운아, 니 아부지 기일이다.”
수화기 너머에서 기름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순천 식당의 점심 장사가 끝나갈 무렵일 것이다. 엄마는 늘 그 시간에 전화를 걸었다. 손이 잠깐 비는 시간.
“이번엔 내려올 거제?”
나는 창가로 걸어갔다. 발밑으로 성수동 골목이 내려다보였다. 대답을 하기 전에 나는 이미 다음 주 캘린더를 머릿속에 펼치고 있었다. 화요일 여의도, 수요일 강남, 목요일 오전에 하나 더. 브리지 라운드를 붙여야 하는 미팅들이었다.
“엄마, 이번 주에 투자사 미팅이 세 개예요. 다음엔 꼭 갈게요.”
잠깐 정적이 흘렀다. 냉장고 문 여닫는 소리 같은 게 멀리서 났다. 이윽고 엄마의 목소리가 툭 떨어졌다.
“니는 맨날 다음이여.”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계산을 했다. 오래된 습관이었다. 죄책감이 무게를 가지면 나는 그것을 숫자로 바꿔 처리했다. 그러면 마음이 정리됐다. 미결이 결제로 넘어갔다.
“제사상 넉넉히 차리세요. 제가 보낼게요.”
“됐어야.”
“두부며 나물이며 사려면 돈 들잖아요. 이번엔 좀 넉넉하게 하세요.”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 침묵을 승낙으로 들었다. 늘 그렇게 들어왔으니까.
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은행 앱을 열었다. 엄마 계좌는 즐겨찾기 맨 위에 있었다. 300만 원. 숫자를 찍고 확인을 눌렀다. 잠깐 로딩이 돌더니 파란 체크 표시가 화면에 떴다. 송금 완료.
그 파란 표시를 보자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확인 화면 아래에 ‘메모 남기기’라는 작은 칸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한 번 눌렀다. 커서가 깜박였다. 잠깐 그대로 두었다가, 아무것도 적지 않고 앱을 닫았다. 적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숫자를 보내는 데는 손가락 몇 번이면 됐는데, 그 빈칸은 채워지지 않았다.
회의실로 돌아가자 정 이사가 고개를 들었다.
“통화 길어지시길래 기다렸습니다.”
“이어가요.”
붉은 숫자가 화면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엄마의 목소리를 화면 밖으로 밀어냈다. 니는 맨날 다음이여. 그 말이 잠깐 귓가에 걸렸다가, 지표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자 지워졌다.
그날 밤 관악구 집은 불이 꺼져 있었다. 현관 센서등이 켜졌다 꺼지는 동안 나는 신발을 벗었다. 안방 문틈으로 스탠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은수가 원고를 보는 모양이었다. 마감이 가까우면 그녀는 밤을 새웠다.
나는 불을 켜지 않고 소파에 앉았다. 넥타이를 풀었다. 매듭이 풀리면서 목이 조금 헐거워졌다. 어둠에 눈이 익어갔다. 냉장고 모터 소리만 낮게 돌았다.
눈이 익을수록 어둠 속 사물들이 윤곽을 드러냈다. 익숙해지는 것은 방의 형태만이 아니었다.
1998년 겨울의 거실이 그 위에 겹쳐 왔다.
부도가 난 그해, 아버지는 불을 켜지 않은 거실에 앉아 있었다. 등을 구부리고. 담배 연기가 어둠 속에서 천천히 풀렸다. 아무 말도 없었다. 텔레비전도 켜지 않았다. 어린 나는 그 방을 지나 화장실에 갈 때마다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그 굽은 등을 보면 뭔가가 목구멍에서 막혔다. 그게 뭔지 그때는 몰랐다.
나는 지금 그 자세로 앉아 있었다. 불 꺼진 거실, 구부린 등, 무릎에 얹은 두 손. 담배만 없을 뿐이었다. 어둠은 그때와 같은 농도로 방을 채우고 있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벽으로 걸어가 스위치를 눌렀다. 거실등이 켜졌다. 부족한 것 같아 주방등도 켰다. 복도등도. 형광등의 흰빛이 방을 가득 채웠다. 어둠이 물러가자 아버지의 등도 함께 물러갔다. 겹쳐 있던 두 개의 거실 중 하나가 사라졌다.
방문이 열렸다.
“당신 왔어?”
은수였다. 안경을 이마 위로 올린 채였다. 손에는 빨간 펜이 들려 있었다.
“어. 방금.”
은수는 갑자기 환해진 거실을 한 번 둘러봤다. 나를 봤다. 넥타이를 손에 쥐고 형광등 아래 서 있는 나를.
“불을 왜 다 켰어?”
“어두워서.”
은수는 잠깐 나를 보다가 다시 물었다.
“오늘 아버님 기일이었잖아. 내려갔다 온 거야?”
나는 대답하지 않고 휴대폰을 꺼냈다. 은행 앱을 다시 열었다. 거래 내역 맨 위에 오후의 송금이 찍혀 있었다. 박순임. 300만 원. 파란 체크.
“미팅이 많아서. 대신 넉넉하게 보냈어.”
은수는 문틀에 손을 얹은 채 서 있었다. 그녀는 단언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물었다.
“어머님이 돈 받으려고 전화하신 걸까.”
나는 화면을 껐다.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은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안경을 다시 내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스탠드 불빛만 다시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나는 소파에 도로 앉았다. 형광등이 너무 밝았다. 그렇지만 끄지 않았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첫 사무실 지하실 열쇠가 손끝에 닿았다. 종일 주머니 속에 있었는데도 차가웠다. 나는 그것을 손바닥 안에 쥐었다. 한참을 쥐고 있었다. 열쇠는 데워지지 않았다.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켰다. 박순임, 300만 원, 파란 체크. 나는 그것을 잠깐 보다가 화면을 껐다. 검은 유리에 형광등 불빛이 반사됐다. 그 흰빛 속에 내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나는 그 얼굴을 오래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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