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원의 아침2화 / 전 33화2

1부 유리의 도시

2화. 끊긴 화살표와 붉은 숫자

서지운


“대표님, 지금 번레이트면 런웨이가 여섯 달입니다.”

정 이사는 노트북을 내 책상 위로 돌려놓았다. 화면 안에서 셀들이 계단처럼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붉은색이었다. 나는 그 붉은색을 봤지만, 셔츠 소매에서 아직 어제의 샴페인 냄새가 났다. 손목을 코 가까이 대지 않아도 났다. 관자놀이 안쪽이 둔하게 눌렸고, 아침에 삼킨 두통약은 아직 일을 하지 않고 있었다. 밤새 서울숲 위로 촘촘하던 불빛이 아직 눈 안쪽에 남아 있었다. 유리벽 너머 사무실은 숙취처럼 조용했다. 어제 여기서 800억이라는 밸류를 불렀던 사람들은 오늘 각자의 모니터 앞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120억이 통장에 꽂히면 그래프는 다시 올라가요.”

“그 120억은 텀시트 단계입니다.”

정 이사는 안경을 고쳐 썼다. 안경알에 스프레드시트의 붉은빛이 잠깐 어렸다.

“그리고 어제, 심사역은 축하도 안 하고 갔습니다.”

나는 그 문장이 싫었다. 반박할 데가 없어서 싫었다. 나는 의자를 뒤로 젖혔다. 천장을 봤다가 다시 화면을 봤다. 6이라는 숫자가 셀 한가운데 박혀 있었다. 정 이사는 마우스를 움직여 붉은 셀 하나를 클릭했다. 그 아래로 다음 분기 인건비와 서버 비용, 광고 지출이 줄줄이 펼쳐졌다.

“여기, 이 줄이 다음 달부터 시작되는 채용 계약입니다. 이미 서명한 오퍼가 열한 명이에요. 이걸 포함하면 여섯 달도 낙관적입니다.”

“정 이사님, 여섯 달이면 충분해요. 브리지 미팅 열두 개 잡혀 있어요. 그중 하나만 클로징돼도 런웨이는 리셋됩니다.”

“그 열두 개 중에 어제 나간 심사역 회사도 있습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노트북을 그의 쪽으로 다시 밀었다. 붉은 셀을 내 시야에서 치우는 방식이었다. 정 이사는 노트북을 닫지 않고 잠깐 그 자리에 두었다. 화면은 여전히 붉은 채로 그의 손 아래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안경을 벗어 셔츠 자락으로 알을 닦았다. 그러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 침묵이 스프레드시트보다 더 오래 방에 남았다.

“닫아도 될까요.”

그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 이사는 노트북을 닫으며 잠깐 나를 봤다. 그 눈빛을 나는 오래 기억하게 되지만, 그날은 그저 피곤한 사람의 표정으로만 읽었다.

오후에 마케팅 팀장 유리가 회의를 요청했다. 그는 태블릿을 안고 들어와 앉기도 전에 CAC 이야기부터 꺼냈다.

“대표님, 고객 획득 단가가 지난 분기 대비 40퍼센트 올랐어요. 채널 효율도 떨어지고 있고요. 예산을 조금 줄이면서 리텐션 쪽으로……”

“두 배로 잡아요.”

유리의 눈이 커졌다. 그는 태블릿을 책상에 내려놓다 말고 손을 멈췄다.

“두 배요? CAC가 오르는 중인데 예산을 두 배로 태우면……”

“지금 점유율 못 먹으면 다음 라운드 스토리가 안 나와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이트보드 앞으로 갔다. 펜꽂이에서 검은 마커를 집어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선을 그었다. 마커가 보드 위를 지나며 끽끽 소리를 냈다.

“성장 곡선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리는 거예요. 우리가 여기까지 끌어올리면, 투자사는 이 곡선을 보고 들어와요. 숫자가 스토리를 만들고, 스토리가 돈을 부르고.”

선 끝에 화살표를 달려고 마커를 눌렀다. 삑, 하는 소리가 났다. 잉크가 끊겼다. 화살표는 반쯤 그어지다 흰 자국만 남기고 사라졌다. 잉크가 다 된 마커였다. 나는 마커를 손목 힘으로 두어 번 흔들었다. 다시 눌러 그었지만 자국은 더 흐려졌다.

유리가 나를 봤다. 화이트보드를 봤다. 펜꽂이에 다른 색 마커가 두 개 더 꽂혀 있었지만 나는 그쪽으로 손을 뻗지 않았다. 대신 흔들던 마커를 멈추고 그냥 뚜껑을 닫았다. 딸깍, 소리가 났다.

“어쨌든 방향은 위예요.”

내가 말했다. 반쯤 그리다 만 화살표가 우리 둘 사이에 걸려 있었다. 우상향 선은 끝에서 힘없이 흩어져 있었다. 유리는 태블릿을 다시 집어 뭔가를 적었다. 손끝이 화면 위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나는 그가 무엇을 적는지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퇴근길, 지하 주차장에서 민혁이 따라 내려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그의 구두 소리가 내 뒤를 따라왔다. 콘크리트 바닥에 소리가 낮게 깔렸다. 주차장은 차가운 매연 냄새와 시멘트 냄새가 섞여 있었고, 천장 어딘가에서 환기 팬이 낮게 돌았다.

“지운아.”

나는 차 문에 손을 얹고 돌아봤다. 손끝에 문손잡이의 냉기가 그대로 올라왔다.

“여섯 달이면 우리 심장 박동이야. 예산을 두 배로 태우면 그 박동이 세 달로 줄어.”

민혁은 화가 나면 목소리가 낮아지는 사람이었다. 그날 목소리는 주차장 바닥만큼 낮았다.

“후속 투자 들어와. 내가 여의도 다 돌아서라도 받아올게.”

“어제 심사역은 왜 그냥 갔을까.”

“한 명이 그런 걸로 뭘.”

민혁은 잠깐 말을 멈췄다. 우리 위에서 형광등 하나가 미세하게 깜빡였다. 그 불빛 아래 그의 얼굴이 반 박자씩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멀리서 누군가의 차가 시동을 걸었고, 그 소리가 벽을 타고 웅 하고 울렸다.

“에러는 로그를 남겨. 지금 무시하면 나중에 원인도 못 찾아. 여섯 달 뒤에 통장 바닥나면, 우리는 왜 그랬는지도 모르는 채로 무너져.”

“안 무너져.”

내가 말했다.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커졌다. 콘크리트 벽이 그 소리를 짧게 되돌려줬다. 그 크기가 스스로도 낯설었다. 민혁은 한 발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나를 오래 봤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서 자기 차 쪽으로 걸어갔다. 구두 소리가 다시 낮게 깔리며 멀어졌다. 나는 그가 뭔가 더 말해주기를 기다렸던 것 같다. 그는 말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이 반박보다 무거웠다.

차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계기판의 불빛이 손등 위로 파랗게 떨어졌다. 주머니에 손을 넣자 첫 사무실 열쇠가 잡혔다. 창업하던 해, 보증금 오백에 얻은 상가 지하실 열쇠였다. 나는 그걸 부적처럼 지니고 다녔다. 손안에서 오래 쥐고 있으면 쇳덩이가 체온으로 데워지곤 했다. 그날은 데워지지 않았다. 신호 대기마다 손안에서 굴려봤지만 차가운 채였다. 손가락 끝으로 열쇠날의 홈을 하나씩 더듬었다. 홈은 예전 그대로였는데 손은 그때보다 무거웠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휴대폰은 조용했다. 조수석에 엎어둔 화면은 한 번도 켜지지 않았다. 은수에게서 문자가 없었다. 어제 파티 날, 자기 얼굴을 거울로 본 적 있냐던 그 짧은 물음 이후로 그는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

없는 게 차라리 편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답장할 말을 고르지 않아도 되니까. 현관 센서등이 켜졌다 꺼지는 동안 나는 어두운 거실에 잠깐 서 있었다. 불을 켜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소파의 윤곽과 식탁 위에 개켜둔 채 그대로인 담요가 눈에 익어갔다.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만 낮게 들렸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켰다. 은수의 이름은 대화 목록 맨 위가 아니라 세 번째로 내려가 있었다. 그 위로 정 이사와 유리의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나는 은수의 창을 열었다가, 아무것도 치지 못하고 다시 닫았다. 주머니 속 열쇠를 한 번 더 쥐었다.

편하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나는 그 거짓말을 그날 밤 여러 번 되풀이했다. 되풀이할수록 조용해지는 집 안에서, 나는 여섯 달이라는 숫자를 세지 않으려고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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