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옥상의 계절
9화. 볕에 데운 시트와 아낀 셔터
햇볕에 말린 시트에서는 뜨거운 풀 냄새가 났다. 마당 빨랫줄에서 걷어 온 것들을 팔에 안으면 아직 볕의 온기가 남아, 층계를 오르는 동안 그 냄새가 목덜미까지 올라왔다. 나는 한 장씩 반으로 접어 각 방 문 앞에 나눠 넣는 중이었다. 205호, 204호, 202호. 문마다 열쇠 구멍 옆에 손톱만 한 고래 스티커가 붙어 있었고, 나는 그게 고래 아저씨의 유일한 낭만이라고 생각했다.
201호 문은 그날도 반쯤 열려 있었다. 여름의 방문이 닫혀 있는 걸 나는 두 달 내내 거의 보지 못했다. 시트를 안은 채 나는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볼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눈이 먼저 들어갔다.
벽에는 사진이 압정으로 아무렇게나 꽂혀 있었다. 마당의 고양이, 처마 밑에서 마르는 미역, 누군가의 뒤통수, 물이 빠진 갯벌. 창가에는 다 쓴 필름 통이 굴러다녔고, 책상 위에는 종이 몇 장이 겹쳐 있었다. 나는 시트를 내려놓는 척 문지방 안으로 반 발짝 들어섰다. 맨 위의 종이는 대학 휴학계 사본이었다. 도장이 찍힌 자리에 커피 자국 같은 갈색 원이 번져 있었다. 그 아래 깔린 종이 한 귀퉁이가 삐죽 나와 있었고, 인쇄된 글자가 보였다.
귀하의 작품이 아쉽게도 선정되지 못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나는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한 번은 눈으로, 한 번은 나도 모르게 속으로. 사진 공모전 낙선 통지였다. 남의 뒤통수와 갯벌과 마르는 미역을 찍어 벽에 붙여두는 사람이, 어딘가에 자기 이름을 적어 사진을 부쳤고, 그 사진이 돌아온 것이다. 나는 시트를 문 앞에 내려놓고 방을 나왔다. 못 본 것으로 했다. 그런데 손끝이 이상하게 뜨거웠다. 볕에 데운 시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날 밤 옥상에 올라갔을 때, 여름은 이미 난간에 팔을 걸치고 있었다. 캔 두 개를 들고 온 나는 하나를 내밀었다. 여름은 받아 들고도 따지 않았다. 손안에서 캔만 몇 번 돌렸다. 평소라면 벌써 뭐라도 물었을 사람이었다. 밤마다 안 자고 뭐 하냐, 서울에서는 뭘 하다 왔냐, 너는 왜 그렇게 말이 없냐. 그런데 그날은 조용했다.
내가 옆에 앉자 여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너 오늘 왜 그래.”
“아니, 그게.”
말이 접혔다. 나는 캔을 땄다. 탄산 터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났다.
“네가 왜 그런 것 같은데.”
되물어놓고 나는 후회했다. 여름이 나를 잠깐 보더니 픽 웃었다. 웃음이 짧게 끊겼다.
“낙선 봤구나. 방문 열려 있었지.”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라고 하는 것도 거짓말이고, 봤다고 하는 것도 훔쳐본 걸 인정하는 일이었다. 여름은 내 침묵을 답으로 가져갔다.
“괜찮아. 세 번째야. 이제 익숙해.”
여름은 캔을 열어 검은 바다 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바다에 한 모금 붓듯이. 익숙하다고 말하는 목소리에 익숙함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 섞여 있었다. 물기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오래 눌러둔 자리에서 나는 소리라고 해야 할지 나는 몰랐다. 파도가 아래에서 한 번 부서졌다.
“찍고 싶은 게 있는데.”
여름이 무릎을 끌어안았다. 맨발이 슬리퍼에서 빠져나와 시멘트 바닥에 얹혔다.
“집에선 그걸 사치라고 불러.”
나는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떠오르는 말마다 여름 앞에서는 가벼워 보였다. 잘될 거야, 다음엔 될 거야, 그런 말들이 목 앞까지 왔다가 스스로 부끄러워 돌아갔다.
“휴학도 사치, 카메라도 사치. 스물한 살이면 슬슬 정신 차릴 나이라고. 우리 집에선 그렇게 말해.”
여름은 목에 건 카메라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낮에는 그렇게 아무렇게나 흔들고 다니던 것을, 그 밤에는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부서질까 봐 그러는 게 아니라, 그게 손안에 있다는 걸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근데 있잖아, 나는 이걸 안 하면 내가 없어지는 기분이야. 이상하지.”
이상하지, 하고 물었지만 대답을 바라는 물음은 아니었다. 나는 처음으로 여름이 나를 보지 않고 말하는 걸 보고 있었다. 낮이든 밤이든, 여름의 눈은 늘 사람을 정면으로 겨눴다. 렌즈처럼. 도망 온 얼굴이라 써 있다고 나를 단번에 읽어냈을 때도 그 눈은 나를 똑바로 봤다. 그런데 그 밤에는 눈이 바다에 가 있었다. 검은 물 위에 아무것도 없는데, 거기 뭐가 있는 것처럼 오래 보고 있었다.
늘 남의 뒤통수만 찍던 사람이 정작 자기 이름이 적힌 종이 앞에서는 어떤 얼굴을 했을지, 나는 그 옆얼굴을 보면서 조금 알 것 같았다. 왜 나를 향해 카메라를 들었다가도 아직이라며 셔터를 거두는지도. 정말 담고 싶은 건 아까워서 못 누르는 사람이었다. 셔터 한 번에 필름 한 칸이 사라지듯, 말 한 번에 뭔가가 사라질까 봐 삼키는 사람. 그 옆얼굴을 보고 있으니 이 사람을 어떻게든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이 안에서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낙선 통지 같은 종이가 다시는 이 사람 책상에 놓이지 않게, 사치라는 말이 이 사람 귀에 닿지 않게, 그런 걸 내가 할 수 있을 리 없는데도.
그런데 나는 그 마음마저 캔을 쥔 손안에 넣어두었다. 잘될 거라고도, 사치가 아니라고도, 그 사진들 좋더라고도 말하지 못했다. 낮에 벽에서 본 갯벌과 미역과 고양이가 눈에 선한데, 그게 좋았다는 한마디가 나오지 않았다. 여름이 셔터를 아까워하듯, 나도 그 밤 내 말을 아꼈다. 아니, 아낀 게 아니라 겁이 났다. 말을 꺼내는 순간 여름이 나를 돌아볼 테고, 그 정면의 눈을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파도가 부서지는 간격을 나는 세고 있었다. 하나, 그리고 조금 뒤에 둘. 그 사이의 조용한 자리에 여름의 숨소리가 들어왔다 나갔다. 여름은 더는 말이 없었고, 나도 없었다. 캔 안의 탄산은 다 빠져나가 미지근해졌다.
먼저 일어난 건 이번에도 여름이었다.
“먼저 내려간다.”
계단 쪽으로 걸어가던 여름이 멈춰 서서 나를 돌아봤다. 그 밤 처음으로 다시 나를 정면으로 봤다.
“너는 나한테 왜 아무것도 안 물어.”
나는 아니 그게, 하고 또 말을 접었다. 여름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철문 안으로 사라졌다. 발소리가 층계를 하나씩 밟고 내려갔다. 나는 미지근한 캔을 쥔 채 난간 쪽으로 조금 더 다가앉았다. 여름이 남기고 간 물음이 어두운 바다 위에 그대로 떠 있었다. 나는 그것을 건지지 못했고, 다음 날 아침 조식을 차리는 내 손에도 그 물음은 여전히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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