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옥상의 계절
7화. 밤바다로 들어올린 숨
창틀의 금을 손끝으로 몇 번 문지르다가 나는 결국 슬리퍼를 꿰어 신었다. 볼펜으로 눌러둔 자국은 아무리 만져도 채워지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갔다는 증거 하나가 손끝에 얕게 걸렸다 풀렸다 할 뿐이었다.
복도는 어두웠다. 3층 끝의 철문은 낮 동안 손잡이까지 데워졌다가 이제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밀자 경첩이 낮게 울었다. 옥상은 달궈진 시멘트 냄새를 아직 게워내지 못한 채였다. 발바닥에 닿는 바닥이 온천물처럼 미적지근했다. 난간 너머로 바다가 있었는데, 그건 밤보다 더 아래에 누운 검은 것이었다. 파도 소리만 없었다면 거기 물이 있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먼저 와 있던 건 여름이었다.
난간에 팔꿈치를 걸치고 어둠 쪽으로 상체를 반쯤 내밀고 있었다. 목에 걸려 있어야 할 카메라는 등 뒤로 돌려둔 채였다. 낮에는 그 렌즈가 늘 나를 향해 겨눠져 있었는데, 어둠 속에서는 그것도 함께 잠든 것처럼 보였다.
“안 잘 거면 이거나 받아.”
돌아보지도 않고 여름이 팔을 뒤로 뻗었다. 손끝에 캔 하나가 닿았다. 차가웠다. 냉장고에서 방금 꺼낸 것이 아니라 얼마쯤 쥐고 있다가 건넨 온도였다. 표면의 물방울이 손등을 타고 손목께로 흘렀다. 언제부터 두 캔이었을까. 하나는 자기 것, 하나는 누군가의 것. 나는 그 하나가 처음부터 내 몫이었는지, 아니면 올라올 사람이면 아무나였는지 잠깐 헷갈렸다.
“근데 있잖아, 너는 왜 밤마다 안 자고 뭐 해.”
여름이 물었다. 밤마다, 라는 말이 걸렸다. 나는 어제 처음 이 집에서 잤을 뿐이었다. 그런데 여름은 마치 내가 여러 밤을 뒤척인 걸 다 보고 있었다는 투로 말했다.
“아니, 그게…”
창틀에 금을 긋고 있었다는 말은 목 안에서 접었다. 하루가 지나갔다는 걸 나무에 새겨두는 스무 살이라니, 소리 내어 말하면 우스울 것 같았다. 여름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캔 따는 소리가 났고, 나도 따라 땄다. 두 개의 탄산이 짧게 부풀었다가 파도 소리 아래로 가라앉았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침묵은 늘 나를 세워두고 심문하는 것이었다. 방에 혼자 있을 때도, 학교 앞 술자리에서 누가 취업 얘기를 꺼내고 다들 잠깐 조용해질 때도, 그 조용함이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려 무언가를 캐물었다. 여기서는 그렇지 않았다. 파도가 한 번 오고 물러가는 사이의 조용함은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발등을 적셨다가 그냥 돌아갔다. 나는 그제야 며칠 만에 숨을 길게 내쉬고 있다는 걸 알았다.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이렇게 의식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여름이 캔을 입에서 뗐다.
“고래는 왜 물 위로 올라오는지 알아?”
모른다고 했다. 정말 몰랐다. 나는 그때까지 고래를 텔레비전 밖에서 본 적이 없었다. 이 마을 이름이 왜 고래인지도 묻지 않았다.
“숨 쉬러 올라오는 거야.”
여름이 턱을 까딱해 검은 바다 쪽을 가리켰다. 마치 저 아래 지금 한 마리가 올라오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물속에서는 못 쉬니까. 아무리 깊이 내려가 있어도 결국은 위로 올라와야 돼. 안 그러면 죽어.”
그러고는 나를 옆눈으로 흘깃 봤다. 어둠 속에서 흰자만 잠깐 반짝했다.
“사람도 그래. 너 지금 딱 그래 보여. 물 밑에 오래 있다가 겨우 올라온 얼굴.”
나는 뭐라 받아치려고 입을 열었다. 나 그렇게 안 힘들다고, 그냥 잠이 안 올 뿐이라고. 그런데 또 말이 목 안에서 접혔다. 여름은 그런 나를 보고 픽 웃었다. 웃음소리도 파도에 얹혀 금방 흩어졌다.
낮의 여름은 자꾸 나를 찍으려 들었고 나는 그게 어색해서 계속 렌즈를 피했다. 그런데 어두워서 서로 얼굴이 잘 안 보이니까, 오히려 여름은 나를 정확히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카메라를 등 뒤로 돌려둔 지금이 낮보다 더 정면이었다.
여름이 빈 캔을 난간 위에 세웠다. 바람이 불면 굴러떨어질 위태로운 자리였는데, 여름은 그걸 신경 쓰지 않았다.
“내일도 올라올 거지.”
물음표가 없는 물음이었다. 나는 우물거렸다.
“아니, 그게, 그럼 뭐…”
그게 이미 온다는 대답이라는 걸 나도 알았고 여름도 알았다. 여름은 더 캐묻지 않고 카메라를 앞으로 돌려 목에 제대로 걸었다. 내려가는 슬리퍼 소리가 계단을 하나씩 밟고 멀어졌다. 나는 난간 위의 빈 캔을 안쪽으로 조금 밀어 넣어두고 한참을 더 서 있었다. 검은 바다 어디쯤에서 정말로 숨을 쉬러 올라오는 것이 있는지 눈으로 찾다가, 아무것도 못 찾고 방으로 내려왔다.
302호의 볼펜은 창틀 위 어제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나는 그걸 집어 들었다. 어제와 같은 손동작으로, 첫 번째 금 옆에 두 번째 금을 그었다. 나란한 두 줄. 겉으로는 어제 것과 똑같았다.
그러나 그 두 번째 금은 하루가 지나갔다는 표시가 아니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게 무엇을 세기 시작한 금인지, 나는 스무 해가 다 지나서야 알았다. 내일 밤을 처음으로 기다리게 된 사람이, 기다림에 자기도 모르게 그어둔 첫 눈금이었다는 걸. 나는 그날 볼펜을 놓으며 그저 손끝에서 열이 가시지 않는다고만 생각했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파도가 왔다가 돌아가고 있었고, 나는 그 소리에 맞춰 한 번 더, 길게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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