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매년 온다6화 / 전 32화14

2부 옥상의 계절

6화. 어긋난 셈과 창틀의 금

강선우


부엌 옆 벽에 손바닥만 한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고래 아저씨의 글씨는 크고 삐뚤었다. 청소 구역과 아침 당번이 요일별로 나뉘어 있고, 칸마다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강선우. 한여름. 두 이름이 처음으로 나란히 한 종이 위에 놓여 있는 걸 보는 아침이었다.

여름이 매직 뚜껑을 이로 물어 뽑았다. 그러고는 자기 이름 옆에 그어진 3층이라는 글자에 두 줄을 긋더니, 화살표를 그려 내 이름 쪽으로 쓱 밀어 붙였다.

“3층은 네가 자는 층이잖아. 자기 자는 데는 자기가 치우는 거지.”

나는 종이를 들여다봤다. 여름의 화살표는 이미 잉크가 말라 있었다. 아니, 그게, 하는 말이 목 어디쯤에서 걸렸다. 원래 3층은 여름의 구역이었고, 2층 청소가 내 몫이었다. 손님방이 몰린 2층이 손이 더 가는 걸 여름도 알 텐데, 하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여름이 새 필름을 감으며 나를 힐끔거렸다. 필름 감기는 소리가 짧게 드르륵거렸다.

“봐. 또 안에다 넣어둔다. 할 말 있으면 하라니까.”

“그럼 아침 당번은.”

겨우 입을 뗐다.

“나눠서 하면.”

“아침은 안 돼.”

여름이 손사래를 쳤다. 매직을 든 손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나 아침에 일어나면 세상이 다 뿌옇게 보여. 초점이 안 맞아. 셔터도 못 눌러.”

그건 핑계였다. 셔터를 누르는 것과 조식 준비가 무슨 상관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여름은 이미 매직 뚜껑을 닫고, 조식 준비 칸의 남은 요일에도 내 이름을 채워 넣고 있었다. 새벽 여섯 시. 밥솥에 쌀을 안치고, 국을 끓이고, 손님상을 차리는 일이 전부 내 쪽으로 넘어왔다.

억울하다는 말이 이번에는 정말 나오려던 참이었다. 그때 여름이 발치에 있던 바구니를 툭 밀어 보냈다. 빨래집게가 가득 담긴 플라스틱 바구니였다.

“대신 저녁 설거지는 내가 다 할게.”

여름이 나를 똑바로 봤다.

“이건 진짜야.”

그 말에는 웬일로 장난기가 하나도 없었다. 진짜야, 하는 세 글자가 이상하게 무겁게 떨어졌다. 무례한 거래였다. 3층 청소와 새벽 조식을 내가 지고, 여름은 밤에 접시 몇 장을 닦는 것으로 셈을 맞추자는 얘기였다. 셈이 맞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바구니를 받아 들고 말았다. 여름이 어깨를 으쓱하고 부엌을 나갔다. 필름 감던 카메라가 목에서 한 번 출렁였다.

오후에 우리는 또 부딪쳤다. 마당 빨랫줄에 시트를 너는 일에서였다. 손님이 빠진 방에서 걷어 온 시트가 대야 하나 가득이었다. 물기를 머금은 천은 무거웠고, 볕은 마당 한가운데로 곧게 떨어지고 있었다.

내가 시트 한 귀퉁이에 집게를 두 개 물리자 여름이 옆에서 혀를 찼다.

“그렇게 하면 밤에 다 날아가.”

“두 개면 충분한데.”

“여기 바닷바람 몰라서 그래.”

여름이 자기 손에 든 집게 하나를 더 물렸다. 딱, 하고 나무 집게가 물리는 소리가 났다.

“어젯밤에도 이불 하나가 저 담 넘어서 옆집 지붕에 걸렸어. 아저씨가 사다리 타고 올라가서 내렸다니까. 세 개는 물려야 돼.”

“아니, 그래도.”

또 말끝이 흐려졌다. 두 개로도 나는 지금껏 아무것도 안 날려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말을 하려는데 여름이 목에 걸린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렌즈가 나를 향했다. 나는 젖은 시트 끝을 쥔 채로 멈췄다.

셔터 소리는 나지 않았다. 여름이 카메라를 도로 내렸다.

“됐다.”

“뭐가.”

“아직 아까워서 못 찍겠어.”

무엇이 아깝다는 건지 묻고 싶었다. 어제도 여름은 마당에서 나를 찍었다가 아직 여기 사람이 아니라며 셔터를 눌렀다 말았다. 오늘은 아깝다고 했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무엇이 달라졌는지, 아니면 애초에 아무 기준도 없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두 달 뒤에 보여준다던 필름 속에 내 얼굴이 몇 번이나 담기게 될지, 그게 문득 궁금해졌다.

여름은 다시 집게로 손을 뻗었다. 시트의 다음 귀퉁이에 하나, 둘, 그리고 셋. 세 번째 집게를 물릴 때 여름의 손끝이 잠깐 힘을 주는 게 보였다. 손톱 밑에 필름 감던 자국 같은 게 살짝 눌려 있었다. 나는 젖은 천보다 그 손끝을 더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 시트 한 장이 다 널리는 동안, 아니 그 뒤로도.

저녁이 되자 여름은 정말로 설거지를 가져갔다. 손님상이 물리고 부엌에서 물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접시가 서로 부딪는 달그락 소리가 규칙 없이 이어졌다. 여름은 그릇을 험하게 다뤘다. 조심해서 다루는 게 아니라, 빨리 해치우려는 손이었다.

나는 3층 복도 끝에서 걸레를 빨고 있었다. 낮 동안 손님방을 훔친 걸레들을 대야에 담가 빨아, 복도 창틀 밖으로 하나씩 널었다. 부엌은 1층인데, 여름이 접시를 놓는 소리는 계단을 타고 3층까지 올라왔다. 물소리와 접시 소리가 층을 하나씩 밟고 올라와 내 손 옆에서 멈추는 것 같았다.

걸레는 나. 빨래집게는 우리 둘. 설거지는 여름. 어설프게 나뉜 셈이었다. 어느 것 하나 공평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어긋난 규칙이 왠지 하루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근거는 없었다. 여름이 매직으로 그은 화살표만큼이나 근거가 없었다.

마지막 걸레를 널고 손을 닦았다. 302호 창가에 서서, 아래층에서 아직도 이어지는 물소리를 들었다. 볼펜이 창틀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그걸 집어 들어, 창틀 나무의 아래쪽에 대고 짧게 한 줄을 그었다. 볼펜 끝을 꾹 눌러 나무에 얕은 금이 파이도록.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몰랐다. 오늘 하루가 지나갔다는 걸 어딘가 새겨두고 싶었을 뿐이었다.

금 하나. 그것뿐이었다. 접시 소리가 그치고 부엌 불이 꺼지는 기척이 들렸다. 내일 새벽 여섯 시에는 내가 그 부엌에서 쌀을 안치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그 사실이 억울하지 않다는 것에 조금 놀라며, 창틀에 파인 금을 손끝으로 한 번 문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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